도서 소개
어떤 음식은 입에 넣기도 전에, 냄새 하나만으로 우리를 오래전 어느 흐린 오후의 골목길에 데려다 놓는다. 『기억의 맛』은 그런 음식과 기억에 관한 책이다.
부산에서 나고 자란 저자에게 기억의 첫 페이지는 늘 할머니의 부엌이다. 된장찌개 냄새와 밥솥의 뿌연 김이 가득하던 가로세로 세 걸음 남짓한 공간. 그 밥상에서 자란 아이는 임용 시험에 합격해 경기도로 발령받았고, 지금은 두 딸을 키우는 워킹맘이자 현직 교사로 살아간다. 그 시간의 마디마다 음식이 하나씩 놓여 있다. 자취 첫날 한 솥 끓여 물릴 때까지 먹은 카레, 할머니의 빈소에서 삼킨 육개장,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던 날 의사가 건넨 일력 한 장 때문에 사러 나간 아이스크림, 아이들을 깨우기 전 새벽에 뭉치던 주먹밥.
저자는 할머니의 손맛을 흉내 내려 불 앞에 서 있다가 엉뚱한 질문에 붙들린다. 이 음식들은 도대체 언제부터, 어떤 사연으로 우리 식탁까지 오게 된 걸까. 그 호기심은 그를 도서관의 서가와 오래된 기록물 사이로 데려갔고, 사적인 기억 뒤에 숨어 있던 거대한 역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제비 한 그릇에는 전쟁 이후 원조 밀가루와 혼분식 장려 정책의 시간이 고여 있었고, 육개장이 장례식장의 기본 메뉴가 된 것은 1990년대의 일이었다. 믹스커피의 출발점은 참호 속 병사들의 손에 들린 한 잔이었다.
그래서 스물세 편의 글은 저마다 두 개의 이야기가 있다. 앞은 지극히 사적인 기억이고, 뒤에는 그 음식이 걸어온 내력을 정리한 코너가 붙는다. 개인의 식탁과 음식의 역사가 겹치는 순간, 매일 무심코 넘기던 끼니가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먹는 일은 기쁨만 삼키는 일이 아니다. 슬픔과 억울함, 안도와 수치와 외로움까지 함께 삼키는 일이다. 그래서 어떤 음식의 맛을 기억한다는 건, 그 시절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함께 떠올리는 일이 된다. 지친 하루의 끝에서 이유 없이 어떤 음식이 사무치게 그리웠던 사람이라면, 이 책의 어느 페이지에선가 자기 이야기를 만나게 될 것이다.
출판사 리뷰
할머니의 부엌에서 시작해 전쟁사와 정책 문서까지 알아보다
『기억의 맛』이 눈에 띄는 이유는 음식 에세이와 관련 역사를 나란히 놓았기 때문이다. 각 장은 저자의 지극히 사적인 장면에서 출발한다. 자취방의 카레 한 솥, 빈소에서 받아 든 육개장 한 그릇, 새벽에 뭉치던 주먹밥. 그리고 글의 뒤편에는 그 음식이 걸어온 내력을 정리한 코너가 붙는다. 카레는 왜 일본의 국민 음식이 되었는지, 육개장은 언제부터 장례식장의 기본 메뉴가 되었는지, 믹스커피의 원형은 어느 전쟁의 참호에서 왔는지. 감정에서 시작해 자료로 착지하는 이 구조가 매 편 반복된다, 자연스레 독자는 자기 사연이 담긴 음식에 공감도 하고, 역사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 백여 건이 넘는 참고 문헌 목록이 책 말미에 붙어 있다는 점도 짚어둘 만하다. 개인의 기억을 다루는 에세이이면서도, 역사 부분에서만큼은 근거를 잘 기록하고 있다.
"많이 묵어라" 한마디에 담겨 있던 말들
이 책의 중심에는 부산의 할머니가 있다. 손주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수저를 들지 않던 사람, 만류하는 손을 뿌리치고 기어이 갈치 살을 발라 입에 넣어주던 사람, 콩잎을 삭히느라 하루가 지나면 양념장을 따라내 다시 끓이기를 반복하던 사람. 사랑이 담긴 할머니의 손길을 기억하며 저자는 문득 생각한다, 그 시간을 조금은 당신 자신을 돌보는 데 쓰셨으면 어땠을까. 할머니의 소원대로 ‘맘껏 훨훨 다니며 세상 구경을 하셨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그리고 정성이 담긴 밥을 먹고 자랐지만 정작 내 아이에게는 배달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는 날이 많다는 고백도 숨기지 않는다. 그래서 이 책의 그리움과 죄책감이 섞여 있고, 바로 그 점이 정직한 고백이 된다.
부끄러운 기억까지 식탁과 함께 말하는 용기
무엇보다 이 책은 아름다운 장면만 고르지 않는다. 누군가 밟아 버린 과자를 주워 먹다 들켜 도망쳤던 아이의 수치심,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무력하게 흘려보내던 나날, 임용 시험에 떨어지고 친구들과의 연락을 끊었던 시절도 그대로 실려 있다. 저자는 그 기억들을 지웠다가 다시 쓰기를 반복했다고 적었다. 그렇게 남은 문장들이기에, 이 책의 위로는 독자에게 와닿을 것이다.

내게 카레는 시작의 맛이다. 초년생의 설렘과 두려움이 뒤섞인 맛.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는 것 같던 어리숙한 신규 교사의 눈물 맛. 텅 빈 집에 돌아온 나를 뜨끈하게 데워준 위로의 맛. 천천히 배워가면 된다고 달래주던 맛.
— 시작의 맛, 카레
붉은 국물에는 고추기름이 떠 있었다.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으니 기름진 맛이 혀에 감겼다. 할머니의 육개장은 이렇지 않았다. 할머니께서는 고추기름을 많이 넣지 않는 대신, 고사리와 숙주, 납작하게 썬 무를 듬뿍 넣어서 맛이 좀 더 깔끔했다. 국거리용 소고기가 간간이 씹히지만 담백하면서도 칼칼한 맛. 기름진 육개장의 맛 때문인지 할머니가 더 보고 싶어졌다. 몸에 퍼지는 온기를 느끼며 수저를 내려놓고 멍하니 한참을 앉아 있었다.
— 눈물의 맛, 육개장
작가 소개
지은이 : 손미주
어린 시절, 할머니의 음식을 통해 사랑을 배웠고, 지금은 그 손길을 떠올리며 가족의 밥상을 차린다. 나를 위해 뜨끈한 한 그릇을 지어주던 할머니처럼, 받았던 사랑을 아이들에게 흘려보내려고 애쓴다. 오늘도 부지런히 삶의 간을 맞추며 글을 쓰고 있다.출간 저서『그래도, 선생님』 (에세이)『다시, 책 속 한 줄의 힘』 (공동 출간, 에세이)『문을 열어보면』 (공동 출간, 단편소설집)『엄마가 이상해』 (전자책, 동화)『교사를 위한 타이탄의 도구들(가제)』 (공동 출간 예정, 자기 계발 에세이)• 블로그 blog.naver.com/megg85• 브런치 brunch.co.kr/@joyau
목차
프롤로그 _ 4
│1부│처음이라는 계절
시작의 맛, 카레 _ 14
바삭했던 순간, 돈까스 _ 23
봄을 캐던 날들, 쑥국 _ 33
미역국의 시간 _ 41
첫 번째 햄버거 _ 48
눈물의 맛, 육개장 _ 57
│2부│버티는 동안 먹었던 것들
특별한 아이스크림을 먹는 날 _ 68
콜라 중독자의 고백 _ 79
작은 기쁨, 떡볶이 _ 86
녹색 병에 담긴 청춘, 소주 _ 95
거품처럼 사라지는 순간들, 맥주 _ 103
특별하진 않지만 충분한 한 잔, 믹스커피 _ 111
│3부│말 대신 놓인 음식
남자들은 왜 고기에 진심일까? _ 122
갈치를 발라주는 시간 _ 132
된장찌개 한 뚝배기 하실래예? _ 141
워킹맘의 구세주, 주먹밥 _ 152
아귀찜, 서툰 사랑의 이름 _ 160
맛의 끝자락, 콩잎 _ 168
│4부│맛으로 남은 시간
에이스, 수치심의 맛 _ 178
시간의 맛, 쁠라 랏 프릭 _ 185
고등어 케밥, 고화질의 맛 _ 195
시간을 삶아낸 한 그릇, 수제비 _ 206
변해온 것, 변하지 않은 것―잡채 _ 216
에필로그 _ 226
참고 문헌 _ 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