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 김민철 · 요조 강력 추천 ★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세상이라
더 늦기 전에 비행기를 탔습니다.”저자 권남희는 스물다섯 살에 번역을 시작해 35년 차 번역가가 되기까지 다양한 역할로 살아왔다. 번역가, 동화 작가, 에세이스트, 딸과 투닥이는 푼수 같은 엄마, 반려견밖에 모르는 개바보,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까지 간병한 딸…….
그사이 삶의 풍경은 조금씩 바뀌었고, 생애주기에 따른 이런저런 이벤트들을 겪었다. 부모님을 차례로 떠나보냈고, 남편 없이 키운 하나뿐인 딸은 어느덧 취업해 제 몫을 하는 어른이 되었다. 오랫동안 키우던 반려견까지 무지개다리를 건너고 나니 적막한 집엔 오롯이 혼자 남았다. 그러던 어느 날, 『츠바키 문구점』의 작가 오가와 이토에게 메일 한 통이 도착한다.
“정말로 이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세상인 것 같아요. 일본 국내도 그렇고, 전 지구적으로도 그렇고요. 그래서 하고 싶은 일은 미루지 않고, 지금 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졌습니다.”
저자는 메일을 읽고 십 년 전부터 버킷 리스트였던 도쿄 한 달 살이를 위해 바로 비행기표를 끊는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라는 마음으로. 돈이 더 많을 때, 시간이 더 많을 때를 기다리다 영영 못 갈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을 안고서. 치열하게 달려온 날들에 쉼표를 찍고 잠시 숨을 고르는 안식월을 보내기 위해.
길치에 혼밥도 못하는 내향인이지만
하고 싶은 일은 미루지 않기로 결심한
내일모레 육십의 도쿄 한 달 살이일본문학을 300권 넘게 번역해 온 번역가라면 도쿄 한 달 살이쯤은 수월할 것 같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타고난 길치에 혼밥도 못 하는 극 내향인인 저자의 도쿄 생활은 좀처럼 쉽지 않다. ‘본전은 뽑아야 한다’는 생계형 번역가의 근성으로 매일 숙소를 나서지만, 쫄고 헤매고 쭈뼛거리기 일쑤다. 목적지를 코앞에 두고도 길을 묻는가 하면, 하루를 마치면 패인을 복기하는 선수처럼 종일 헤맸던 길을 하나씩 되짚어 본다.
“하루 동안 2만 2000보를 걸었다. 삼분의 일은 헤매느라 걸었을 것이다. 구글맵을 닫고, 가마쿠라의 여운이 가시기 전에 『츠바키 연애편지』를 번역하기로 했다. 여행도 번역도 결국은 같은 과정 같다. 길을 찾고, 길을 잃고, 다시 길을 만들고. 아이고, 번역 30여 년 차에 큰 깨달음 얻었네. 누가 보면 가마쿠라 가서 도로 공사라도 하고 온 줄 알겠다.”
저자는 매번 길을 잃지만, 오래 좋아하고 오래 일해온 시간만큼은 정확히 제자리를 찾아 뜻밖의 선물이 되어 돌아온다. 자신이 번역한 마스다 미리의 책에 나오는 디저트 가게를 순례하고, 데뷔작부터 오랫동안 작품을 번역해 온 오가와 이토의 집에 초대받아 우정을 나눈다. 일본에 번역 출간된 자신의 에세이 북토크를 통해 현지 독자들을 만나고, 일본 최대 출판사 쇼가쿠칸 회장의 환대를 받으며 일본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꿈같은 하루를 보낸다.
불안해도 배짱 있게, 계획 없어도 기세 좋게
온전히 지금을 살아내는 중년의 인생 기술여행에는 ‘이 나이’가 되어서야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이 따라온다. 좋은 곳을 가면 문득 돌아가신 엄마 생각이 나 울컥,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니는지 묻는 딸의 안부에 또 한 번 울컥. 20대에 만나 어느덧 30년의 세월이 훌쩍 넘는 우정을 쌓아온 일본 친구들과 나누는 대화 주제도 어느새 ‘부모 돌봄과 치매’가 되었다. 스무 살의 여행이 설렘으로 가득하다면 ‘이 나이’의 여행은 아쉬움과 후회, 애틋함과 감사함으로 빼곡히 채워진다.
그러나 우울도, 나이 듦도 권남희에게는 지나치게 심각해질 일이 아니다. 기분이 가라앉으면 나름의 방법으로 끌어올리고, 나이 탓을 하고 싶어질 때면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며 웃어버린다. 삶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자신까지 못마땅해하지 않는 것. 그러면서도 좋아하는 것에는 진심이고,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겁이 나도 일단 해보는 것. 어쩌면 그것이 절절매지 않고 살아가는 권남희식 요령인지도 모른다.
“게으름은 불치병이다.”
“우울증은 수용성이어서 샤워를 하면 좋아진다던데, 아무래도 금(金)용성 같다. 돈을 써야 좋아진다.”
“나는 젊었을 때 지금보다 더 송장처럼 지냈다. 역시 젊음의 문제가 아니라 성향의 문제다.”
“아마 나는 사랑을 택할 것 같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게 더 폼 나잖아.”
번역가 중에 가장 귀엽고 아줌마 중에 제일 글 잘 쓰는 권남희의 입담은 이 책을 끝까지 읽게 만드는 가장 큰 힘이다. 페이지가 줄어드는 게 아쉬울 만큼 웃기다가도, 별것 아닌 듯 툭 던진 한마디에 어느새 코끝이 찡해진다. 삶의 고단함도, 나이 듦의 서글픔도 한바탕 웃을 수 있는 이야기로 바꿔버리는 것. 평소 에세이를 즐겨 읽지 않는 사람도 권남희의 글만큼은 찾아 읽게 되는 이유다.
나이가 들수록 해야 할 일에는 익숙해지지만, 정작 하고 싶은 일을 위해 시간을 내는 데는 인색해진다. 그런 우리에게 이 책은 제법 솔깃한 선례가 되어주며 마음 한구석에 미뤄둔 일을 슬며시 꺼내보게 만든다. 역시나, 나이가 들어도 인생에 방학은 필요하지 않을까?

우여곡절 끝에 우에노역에 도착하여 험난하게 성지순례를 마친 기념으로 편의점에서 캔 맥주를 사 숙소로 돌아왔다. 맥주를 마시며 노트북을 켜서 구글맵을 보았다. ‘아, 여기서 이렇게 가야 했구나’, ‘여기서 엄청나게 돌아갔구나’ 하고 패인을 복기하는 선수처럼 종일 걸었던 길들을 하나하나 짚어 보았다. 길치 문제가 아니라 지능 문제인가 싶어 좀 우울해졌다.
길치는 목적지 앞에서 길을 묻는 국룰을 어기는 적이 없다. 심지어 초행도 아니다. 할아버지가 가르쳐준 대로 가고 있는데, 옳지, 거기로 가서, 오른쪽으로요, 예, 거기로 내려가요, 하고 뒤에서 인간 내비게이션이 되어주셨다. 얼마나 미덥지 않아 보였으면 다 큰(크다 못해 늙어가는) 어른에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