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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기일지
은행나무 | 부모님 | 202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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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소개

우리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감정을 감추고, 말하기보다 말하지 않기를 택한다. ‘하지 않는 법’과 ‘침묵하는 법’을 먼저 배운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나를 남 대하듯 제3자의 자리에 내려놓는다. 초연하고 묵묵해 보이는 태도는 어쩌면 감정의 파고에 휩쓸릴까 두려워 축조해 올린 방어벽에 가까울지 모른다.

이선진 첫 장편소설 《잃기일지》는 그런 방어벽을 겹겹이 두른 채 살아가는 ‘진진주’의 내면을 집요하게, 하지만 다정하고 위트 있게 파고든다. 진진주의 유일무이한 특장점은 자기 자신과의 인력을 지워버리고 스스로를 ‘창백한 푸른 점’처럼 아득히 타자화하는 일이다. 상처와 결핍으로 채워진 어린 시절 속에서 그는 1인칭 주어 ‘나’를 지우고 고유명사 ‘진진주’라는 부캐 뒤로 숨는다. 이는 고유한 자신을 지켜내고자 하는 부단한 애씀이다.

그러던 중 진진주가 세운 견고한 성벽에 조금씩 금이 간다. 그 파열을 일으키는 존재는 하나뿐인 애인도, 위장 결혼 중인 남편도 아닌 조카 ‘이석기’다. 철이 없는 건지 세상의 이치를 깨쳐버린 건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질문을 해대는 다섯 살 금쪽이. 석기는 진주의 방어기제에 파문을 일으키는 유년의 알레고리로 작동한다. 예측 불가능한 “프리티 카오스” 그 자체인 석기를 돌보고 잃어버리고 다시 찾는 일련의 소동 속에서, 진주는 오랫동안 외면해왔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돌아본다.

박연준 시인의 말처럼, 《잃기일지》는 “여러 개의 목소리를 쓰고 벗으며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이야기. 그러므로 “그의 유일한 가면은 목소리”이고, “이 소설은 목소리가 전부인 소설, 목소리로 이루어진 변검술”이다.

  출판사 리뷰

침묵의 빗장을 열고 마침내 닿는 마음
유실된 계절을 지나 ‘나’라는 주어로 귀환하기

《밤의 반만이라도》 이선진 첫 장편소설 출간

“그의 유일한 가면은 목소리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목소리가 전부인 소설,
목소리로 이루어진 변검술이다.”_박연준(시인·소설가)


우리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감정을 감추고, 말하기보다 말하지 않기를 택한다. ‘하지 않는 법’과 ‘침묵하는 법’을 먼저 배운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나를 남 대하듯 제3자의 자리에 내려놓는다. 초연하고 묵묵해 보이는 태도는 어쩌면 감정의 파고에 휩쓸릴까 두려워 축조해 올린 방어벽에 가까울지 모른다.

​이선진 첫 장편소설 《잃기일지》는 그런 방어벽을 겹겹이 두른 채 살아가는 ‘진진주’의 내면을 집요하게, 하지만 다정하고 위트 있게 파고든다. 진진주의 유일무이한 특장점은 자기 자신과의 인력을 지워버리고 스스로를 ‘창백한 푸른 점’처럼 아득히 타자화하는 일이다. 상처와 결핍으로 채워진 어린 시절 속에서 그는 1인칭 주어 ‘나’를 지우고 고유명사 ‘진진주’라는 부캐 뒤로 숨는다. 이는 고유한 자신을 지켜내고자 하는 부단한 애씀이다. 그러던 중 진진주가 세운 견고한 성벽에 조금씩 금이 간다. 그 파열을 일으키는 존재는 하나뿐인 애인도, 위장 결혼 중인 남편도 아닌 조카 ‘이석기’다. 철이 없는 건지 세상의 이치를 깨쳐버린 건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질문을 해대는 다섯 살 금쪽이. 석기는 진주의 방어기제에 파문을 일으키는 유년의 알레고리로 작동한다. 예측 불가능한 “프리티 카오스” 그 자체인 석기를 돌보고 잃어버리고 다시 찾는 일련의 소동 속에서, 진주는 오랫동안 외면해왔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돌아본다. 박연준 시인의 말처럼, 《잃기일지》는 “여러 개의 목소리를 쓰고 벗으며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이야기. 그러므로 “그의 유일한 가면은 목소리”이고, “이 소설은 목소리가 전부인 소설, 목소리로 이루어진 변검술”이다.

규정할 수 없는 기벽과 투명한 질문을 지닌 석기의 시선은, 진주가 스스로를 타자화하며 봉인해두었던 기억들—엄마의 부재와 침묵, 바기오에서의 ‘펄’과의 추억—을 단숨에 현재로 호명한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이 소설이 상실을 섣부른 치유나 결손의 메움으로 환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상실을 온전히 겪어내려 하는 적극적 애도 과정을 통해, 침묵 속에 유폐되었던 유년의 자아를 현재의 주체 안으로 편입시킨다. 《잃기일지》는 과거와의 진정한 화해란 여전히 통증으로 남아 있는 유년기를 다시 주어로 회복하는 작업임을 보여주며, 동시대 상실의 서사 가운데 가장 섬세하고 단단한 문학적 응답을 완성해낸다.

이윽고 내 가슴속의 불이 꺼지고 빛과 어둠의 배열이 깨진 순간, 나는 난생처음으로 내 침묵을 배신했다. 내가 내뱉은 말이 끝끝내 나를 혼자 내버려두고 떠나버림으로써 나를 영영 외롭게 만들 거란 걸 알면서도. (121쪽)

두 겹으로 포개지는 시간의 궤도
스스로 미아가 되기를 택했던 계절을 마주하다


​출판사에서 타인의 문장을 다듬는 일을 하고, 로맨스 소설 속 오탈자 찾기를 취미로 둔 편집자 진진주에게 삶이란 온전히 몰입하는 무대가 아닌, 객석에 우두커니 앉아 무대 위의 자신을 바라보는 일에 가깝다. 감정이 소용돌이칠 때마다 “나는 마음이 아프다”라고 말하지 않고 “진진주는 마음이 아프다”라며 스스로를 제3자의 자리에 놓아두는 사람. 자신과의 인력을 지워내고 타인처럼 거리를 두어야만 마음이 편한 그는 규정되지 않은 관계 속에서 감정을 극도로 아끼며 일상을 영위해나간다. ​모든 것이 겉돌던 12월의 어느 날. 갑작스러운 소란과 함께 첫눈이 내리고 진주는 뜻하지 않게 시누이의 아이들을 홀로 돌보게 된다. 고요하던 진주의 일상에 침입한 다섯 살 조카 석기는 예측 불가능한 존재다.

너는 둘 중에 누가 더 좋은데? 만약 둘이 영영 헤어진다 그러면 누구랑 같이 살 건데? 진진주는 그렇게 물으려다 관두었다. 이석기는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하고 물었을 때 둘 중 하나를 택하는 대신 “나는 엄마랑 아빠 하나뿐이야!” 자신 있게 소리치는 애였다. ‘하나뿐’의 정의를 지 맘대로 달리했다. (21쪽)

석기는 소떡소떡이 먹고 싶다고 떼를 쓰다가도 막상 눈앞에 대령하면 “이제 안 먹고 싶대요, 쟤가”라며 엉뚱하게 주어를 돌려버린다. 석기의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은 계속된다. 어린이집에서 낮잠을 자다 말고 횡단보도 위에 멈춰 서서 스스로 ‘실종’되기를 자처한다. 건너기 위한 길이 아니라 잠시 머무르기 위한 자리인 양 횡단보도 한복판에 선 조카를 데리러 가며, 진주는 결코 흔들리지 않을 줄 알았던 자신의 내면에 파문이 이는 것을 느낀다. ​게다가 석기의 유치원 가방 속에서 발견된 한 장의 종이—겉보기엔 텅 빈 백지 같지만 연필을 눕혀 살살 문지르면 글씨가 드러나는 깜지—는 석기의 손목에 남아 있던 벌건 시계 모양 자국과 맞물리며 먼 시간 속에 잠들어 있던 진주의 기억을 현재로 소환한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이석기의 물음을 건네받은 그때 그 순간, 나는 스스로를 남처럼 대하지 않고 스스로처럼 대했다. 인사이드 아웃, 부캐를 안으로 수납하고 본캐를 밖으로 내돌렸다. 전설의 포켓몬처럼 진귀한 순간이었다. 난 나일 뿐이야,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순 없어! (31쪽)

이야기는 낯선 이국의 어학원 지하 방, 역시 세상과 섞이지 못하고 겉돌던 아이 ‘펄’과 마주 앉아 써내려가던 진주의 교환 사전으로 독자들을 데려간다. 단어의 뜻을 제멋대로 정의하며 마음을 나누던 시간, 진심을 다해 사랑했던 것들을 끝내 지키지 못하고 영영 잃어버려야만 했던 상실의 계절이, 지워지지 않는 손목 흉터처럼 진주의 시간 속에 여전히 똬리를 틀고 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내’가 아닌 ‘진진주’라는 타인으로 숨어들어야 했던 과거가 석기의 투명한 시선을 따라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세상 속에서 자꾸만 길을 잃어버리는 석기와 시간 속에서 영영 길을 잃어버린 채 멈춰 선 진주. 두 사람은 어긋난 시곗바늘을 되돌리듯 서로의 발자국을 포개며 잃어버린 기억을 따라 걷기 시작한다. ​진주는 과연 자신이 외면해왔던 슬픔과 결핍의 페이지를 제대로 마주하고 침묵의 사전 속에 잃어버렸던 ‘나’라는 단어를 다시 적어넣을 수 있을까? ​

사춘기가 오기가 무섭게 온갖 규칙을 위반하고 세계를 헤집고 다니는 식으로 존재감을 발휘하는 애들한테 어른들이 아주 발라당 까져가지고! 하고 싫은 소리를 했다면, 나는 까지는 게 아니라 지워지는 방식으로 살아남았다. 그러니 하루가 멀다 하고 조금씩 서서히 지워지던 내가 앓던 건 성장통도 존재통도 아닌 부재통이었을지도 몰랐다. (127~128쪽)

상처의 자리 위에 다시 쓰는 단어들
침묵을 건너 비로소 완성되는 자기 호명


《잃기일지》는 언어의 형식과 균열을 서사의 뼈대로 삼는 지적인 소설이다. 진주는 어린 시절 경험한 어머니의 죽음 이후, 선택적 함묵증을 겪으며 ‘말’을 잃고 침묵을 모국어처럼 체득한 인물이다. 그에게 언어는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세계로부터 자신을 격리하는 가림막이다. 진주는 끊임없이 자신을 1인칭이 아닌 ‘진진주’라는 3인칭으로 부르며 고통의 주체로부터 자아를 탈각시킨다. 그와 동시에 소설 전반에 반복되는 “내 사전에 ~은 없다”라는 문장과 단어의 의미를 자유롭게 정의하는 사전 놀이는 사회가 규정한 정상성에 함몰되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자리를 지켜내려는, 조용하지만 완강한 방어적 선언에 가깝다.

소설은 ‘지금-여기’의 진주와 ‘그때-거기’의 진주를 “시시각각(씨씨깎깎)” 겹쳐놓으며 시간의 선조성을 거부한다. 작가의 말에서 고백하듯, 시간은 단선적으로 흐르지 않고 “양안복시”처럼 두 겹으로 포개진다. 필리핀 바기오의 지하 방에서 펄과 주고받았던 교환 사전의 침묵은 현재 시점에서 조카 석기가 보여주는 기벽과 공명한다. 석기는 진주의 유년 시절이 투사된 거울인 것이다. 무엇보다 작가는 “잃어버린 것을 더 잘 잃어버리는” 일을 통해, 온전한 소유나 완벽한 복원이 불가능한 세계에서 억지로 빈자리를 메우기보다 그 부재 자체를 응시하고 품어 안는다. 검은 잉크로 쓴 문장 뒤에 남겨진 새하얀 깜지의 눌린 자국처럼, 드러나지 않았으나 분명히 존재하는 침묵의 상흔을 끌어안을 때, 진주는 비로소 오랜 시간 남처럼 대하던 ‘진진주’라는 방어벽을 깨고 나와 “나는 나”라고 스스로를 호명하며 주어의 자리 위에 당당히 바로 선다.

똑똑, 하고 노크하자 굳게 잠긴 문 안쪽에서 딸깍, 하고 잠금쇠 풀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건 곧 입국이 허가되었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내게 허락된 건 한시적인 체류일 뿐, 서로의 시간과 서로의 마음과 서로의 사전에 적힌 단어를 완전히 포개놓는 것은 밤하늘의 별을 따 오는 것만큼이나 아득한 일이었다. 그 아늑한 아득함 속에서, 우리는 종종 서로의 이름을 포개어놓았다. (134~135쪽)

그런데 어째서인지 이석기의 물음을 건네받은 그때 그 순간, 나는 스스로를 남처럼 대하지 않고 스스로처럼 대했다. 인사이드 아웃, 부캐를 안으로 수납하고 본캐를 밖으로 내돌렸다. 전설의 포켓몬처럼 진귀한 순간이었다. 난 나일 뿐이야,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순 없어!

“하여간 진짜 시어머니 납셨다니까.”
진진주가 오래 참은 오줌을 눈 뒤처럼 진저리쳤다.
“맞잖아, 시어머니.”
“응?”
“시어머니 맞다고. 암만 레즈랑 게이랑 위장 결혼을 했대도, 호적상으로는 진주 네가 며느리인 게 명명백백하니까.”

이물질이 침입했다고 여겨지는 일종의 비상사태. 그 이물질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애쓰는 과정이 곧 진주의 탄생기라면, 지금 나에게 가장 낯설고 불결하고 아름다운 이물질은 무엇일까? 때때로 진진주는 생각했다. 그냥 생각한 건 아니고, 완전범죄를 꿈꾸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던 범인이 필적을 들키지 않기 위해 신문에서 글자를 하나하나 오려 문장을 만들듯,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걸쳐 조각조각 흩어진 침묵의 파편을 애써 그러모으는 방식으로, 은밀하게.

  작가 소개

지은이 : 이선진
소설가. 2020년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밤의 반만이라도》가 있다.

  목차

잃기일지 …… 007
작가의 말 …… 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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