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쪽문
그곳은 바람이 다니는 길
쪽문을 나서자 꽃무늬 치마가 팽팽해진다
겨드랑이에 날개라도 솟은 듯
발걸음이 날고 있다
바람에 흩날리는 검은 비닐봉지였다가
애드벌룬이었다가
때로는 날개옷 입은 바람개비처럼
팔다리를 사방으로 흔들어댄다
나는 전생에
바람을 신으로 모시는 유목민이었나
숨구멍은 쪽문으로 뚫려있어
산책로 철망을 향하면
좌우 살필 겨를이 없다
되돌아오는 길, 잃어버리고
떠돌이 바람이 되어
너도바람꽃 콧잔등에 간지럼 태울까
이도 저도 시큰둥한 걸음걸이
이 골목 저 골목 바람결에 떠돌다가
가로등 아래 누운 긴 그림자 뒤를 밟는다
땅거미가 발자국을 삼키는
쪽문 앞에서
내 안에 갇혀 있던 바람이
문을 나선다
환승
지하에서 지상으로 나올 때마다
방향을 잃는다
불빛이 넘실대는 거리를 등지고
건물 그림자 얼룩진 골목으로
습관처럼 들어선다
신호대기 중인 차들 눈 부릅뜨고
일제히 출발 신호 쪽으로
한 뼘 두 뼘 타이어를 움직이는데
너에게로 가는 길목에서 등을 돌린다
너와 내가 스쳐갈
환승 시간이 다가올수록
가로수 잎사귀가 난독증을 앓는다
직진만 배우던 길 위에서
후진등을 켜고 있다
어쩌면
더는 돌아오지 않을 환승구간
너를 향한 발끝이 정지선에 멈춰 있다
너무 밝은 불빛에 눈앞이 캄캄해지듯
환승하는 밤엔 무언가 자꾸 자란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지상에서 지하로
아무 일도 아닌 듯, 아무것도 아닌 듯
자꾸만 사라지는 얼굴이 있다
바닥을 읽다
꿈이라는 게 어디에 닿아도
다섯 발가락 가지런히 앞세우는 거라니
땅 꺼지듯 바닥을 찍어 누른 후
한 발 앞서가는 게
고작, 구르는 돌 허공으로 차올리는 일
홀로서기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두 다리로 버텨온 시간이
발바닥에 겹겹이다
궁지에 몰릴수록 오체투지 몸부림을 생각해 본다
서해안 개펄 어디쯤이었던가
가장 낮은 몸으로 바닥을 살폈던 일
농게가 들락거린 캄캄한 숨구멍의 정적을 보았다
갈매기 그림자만 스쳐도
구멍으로 숨어드는 농게처럼
낮아질수록 더 깊은 곳으로 몸을 숨긴다
옆걸음도 없이 뒷걸음도 없이
밟고 밟히며 묵묵히
지상의 땅바닥을 버텨온 무게
길바닥을 삼킨 싱크홀이
오늘도 아가리 크게 벌리고 있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이복희
경북 김천 출생2010 《문학시대》 수필 신인상 2022 계간 《시에》 시 신인상시집 『오래된 거미집』 『바닥을 읽는 사람』수필집 『내성천에는 은어도 별이 된다』 공동시집 『바람집을 썰다』 외 다수
목차
** 시인의 말
1부 바람의 노래
쪽문 12
갈대밭에서 귀를 세우다 14
새의 밀서 16
몽돌을 굴리다 18
텔레파시 20
누에섬 22
반야사 배롱나무 24
오목눈이집 26
자작나무 탄력 28
혀 30
환승 32
2부 바닥을 읽다
굶주린 전광판 36
바닥을 읽다 38
고장 난 내비게이션을 켜고 40
도시 사냥꾼 42
중독 44
밤의 고수 46
통돌이세탁기 48
인앤아웃 50
문래동의 봄 52
돌아가는 타이머 54
코앞이 절벽 56
페이스 메이커 58
3부 돌의 지문이 아프다
돌의 지문 62
가출은 또 다른 가출을 부르고 64
자두 66
얼굴을 비비다 68
구제 신발 70
콜링 72
그해 여름 저녁 74
나뭇잎 책갈피 76
석이의 비석 78
오형석탑 80
들돌 82
부겐빌레아만 붉다 84
4부 그늘집 지어 올리지
엄나무 88
명주달팽이 90
가면놀이 92
칼집 내기 94
천국 분양 96
부다와 페스트 98
다뉴브강의 신발들 100
풀문 102
그늘 의자 104
아이스 클라이밍 106
공중곡예 108
**해설
옆걸음도 뒷걸음도 없이┃박덕규(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