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홍정미의 첫 시집 『가방 속 보르헤스』는 익숙한 세계를 낯선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집이다. 시인은 평범한 골목에서 우주로 향하는 길을 발견하고, 산맥에서 한 권의 책을 읽으며, 흩어진 단어들을 단단한 문장으로 빚어낸다.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대상들을 자유롭게 연결하는 상상력은 그의 시를 예측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이끈다.
그의 시에서 현실과 환상의 경계는 느슨하다. 자연과 사물, 기억과 언어가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 때로는 아름답고, 때로는 낯설며, 때로는 날카로운 문장들이 하나의 미로처럼 이어진다.
그 미로를 걷다 보면 시인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 조금씩 알게 된다. 어쩌면 그것은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자신의 마음과 세계일 것이다. 길을 잃는 순간 오히려 새로운 문이 열리는 시, 홍정미의 첫 시집에서 그 낯선 입구를 함께 만나보자.
출판사 리뷰
“시는 출구가 아니라 또 다른 입구였다”
홍정미의 첫 시집 『가방 속 보르헤스』는 익숙한 현실에서 출발해 문학과 예술, 여행과 기억의 세계로 뻗어나간다.
보르헤스와 최승자의 문학, 클림트와 모네의 그림, 바흐와 에타 제임스의 음악은 시인의 감각을 거쳐 새로운 언어로 태어나고, 세계 곳곳에서 마주한 풍경은 시인의 기억과 상상 속에서 또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
한 장의 승차권이 지나간 시간을 불러내고, 낯선 풍경이 새로운 문장을 만들어내듯 홍정미의 시는 하나의 대상을 오래 바라보며 그 너머에 있는 세계를 찾아간다.
『가방 속 보르헤스』는 그렇게 수없이 갈라지는 길을 따라가며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시인의 첫 기록이다.
▶ 문학·미술·음악이 시가 되는 순간
보르헤스의 미로, 최승자의 시, 클림트와 모네의 회화, 바흐와 에타 제임스의 음악이 홍정미의 시 안에서 새로운 의미로 거듭난다. 「가방 속 보르헤스」에서는 문학적 상상력이 내면의 미로로 이어지고, 「바흐를 만나다」에서는 음악을 통해 자신에게 돌아가는 내면의 여정을 보여준다. 다른 예술의 언어를 자신의 경험과 감각으로 받아들여 독창적인 시적 이미지로 바꾸어내는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 세계의 풍경을 담은 시적 엽서
홍정미는 여행지에서 마주한 풍경을 ‘엽서’처럼 시집에 펼쳐놓는다. 오스트리아 할슈타트와 비엔나, 크로아티아의 플리트비체와 두브로브니크, 인도의 암베르성과 타지마할, 몽골의 초원과 산맥 등 낯선 장소들이 시인의 언어를 통해 새롭게 기록된다. 풍경의 아름다움을 옮겨 적는 데 그치지 않고, 그곳에서 발견한 이미지와 감각을 문장과 책, 음악의 세계로 확장해 여행의 순간을 독특한 시적 풍경으로 완성한다.
내 가방 속에는
보르헤스 미로로 가득하다
둥글둥글 낯선 미로, 우물우물 복잡한 미로, 흥미로운 소문에 갇혀버린 미로, 시간의 무한한 갈라짐으로 속수무책인 미로, 앞뒤가 맞지 않는 초고가 뒤죽박죽 엉켜 있는 가방 속,
보르헤스의 미로는 백 년 내내 어둡고
익숙하지 않은 문장처럼 고요하다
― 「가방 속 보르헤스」 전문
담으로 이어진 주택을 지나
행성 프록시마b까지 가는 길
댕그랑댕그랑
종소리 은밀하게 손 내밀면
무수한 은유가 춤을 춘다
목련 하얀 치맛자락이 나를 툭 건드리면
순간, 환하게 불이 켜지고
나는 탱고 춤 속으로 휩쓸려 들어간다
태양과 이어져 있는 길
바람난 생명으로
가득하다
― 「목련 길을 걷다」 전문
봄이 오면 일어나서
걸어 나갈 수 있을 거야
밭에 감자도 심고 고추도 심어야지
감자가 여물어 가는데
그는 없다
석양과 도시의 변두리를 좋아하더니
그곳에서 노을 하나 소유했을까
너무 아름다워 서러운 노을 하나 소유했을까
그곳은 알 수 없는 블랙홀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다
이 세상 저물녘, 그는 어둡고 악몽 같은 복도였고
현기증 일으키는 깊숙한 층계였으므로
해줄 수 있는 일은
감자를 캐서 그의 복도와 층계를 채우는 것
어두운 복도에 등불을 단다
그는 나로부터 자유로이 날아 봄이고 여름이다
― 「아버지의 복도」 전문
작가 소개
지은이 : 홍정미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고,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24년 『애지』로 등단했으며, 2025년 ‘시삶문학상’을 수상했다.홍정미 시인은 내면세계의 언어를 탁월하게 구현하며 영혼 여행자의 면모를 보여주는 시인이다. 그의 첫 번째 시집인 『가방 속 보르헤스』를 따라가다가 보면, 내면의 길은 구부러지고 뒤틀리다가 불쑥 솟아오르고, 또 지하 깊숙이 곤두박질치기도 하는데, 이쯤에서 독자는 어지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시의 꼬리를 놓치지 않고 따라가면, 미로의 끝에서 빛나는 고뇌 혹은 아름다운 서정과 마주하게 된다.
목차
시인의 말 5
1부
가방 속 보르헤스 12
외딴집의 내력 13
운명교향곡 14
에로틱하고 모호한 ― 클림트의 유디트 16
엽서 ―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17
백일홍의 시간 18
목련길을 걷다 19
바흐를 만나다 20
모네의 풍경 22
내 무덤 위에, 花 24
곡우穀雨 25
경칩 26
춘천에서 두브로브니크까지 28
2부
콘티누오의 저녁 32
문득 34
부엉이와 보름달 ― 딸에게 35
가을, 은행나무 36
클림트, 키스 37
이순耳順 2 38
샌디의 샛길 40
불면증 41
붉나무의 계절 42
감자를 캐며 44
목백합 아래서 46
또, 목련 47
봄은 소란으로 가득했지만 48
글자로 그린 풍경 50
다시, 봄 51
벚나무 이어진 강둑을 지나 52
3부
청량리에서 춘천까지 56
모두 한순간에 일어났어 58
소나기 60
쥐의 똥구멍을 꿰맨 여공 61
진눈깨비 내리다 62
강가를 걸으며 64
운수골 65
이순耳順 1 ― 겨울 백두산에서 66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 68
퇴고 70
존재의 미로 71
클림트, 생명의 나무 72
목련을 훔치다 73
자작나무 숲에서 74
늙은 호박 76
모스크바 일지 ― 여성의 날에 78
모스크바, 눈 80
4부
내몽골 초원에서 82
엽서 ― 오스트리아 할슈타트에서 83
엽서 ― 인도 암베르성에서 84
엽서 ― 크로아티아 플리트비체에서 86
타지마할에서 87
일몰 88
아버지의 복도 89
구름의 문턱에서 90
독서 92
엽서 ―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에서 94
여행자가 되어 96
엽서 ― 부다페스트에서 98
엽서 ― 슬로베니아 블레드성에서 99
엽서 ― 서몽골 음산산맥에서 100
에타 제임스의 블루스 102
해설┃안현심
보르헤스의 미로 찾기 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