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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의 기하학
한국문연 | 부모님 | 202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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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소개

<불꽃의 기하학>은 전신마비라는 육체의 감옥에 갇힌 시인의 고백을 담은 일곱 번째 시집이다. 여기에 실린 시편들은, 문학이 인간에게 단순한 취미나 장식이 아니라 영혼의 불꽃을 불사른 존재론적 생존 투쟁 그 자체임을 웅변한다.

시인을 가장 두렵게 한 것은 장애와 죽음의 공포가 아니었다. 육신의 부자유라는 자명한 핑계를 발판 삼아, 정신마저 황폐해져 본연의 자아를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여기에 겹친 어머니, 아버지, 동생의 죽음과 아내의 암 투병은 실존적 재앙이었고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비극의 임계점을 넘어선 것이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어 스스로 죽음조차 선택할 수 없었던 절대적 무력감에서, 시인이 붙잡은 것은 입에 문 대젓가락과 컴퓨터 자판이었다.

황원교 시인은 파괴적인 열정에 휩싸이지 않고, 현실을 받아들이고 누그러뜨려 자연과 생명에 적합하게 만드는 정련의 과정을 시로써 수행한다. 그는 유서 쓰듯 혈서 쓰듯, 뼛속에서 문장을 파낸다. 그 문장들은 수행의 도구이자 결과이다. 그의 수행은 불꽃의 상상력, 시간적 상상력, 우주적 상상력으로 확장된다.매일 쓰는 유서차라리 일시에 전소되었다면이토록 눅눅한 통증이 계속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안개 낀 새벽,창틀에 고여 있는 것은밤새 나를 사르고 남은 희미한 그을음,불은 쉽게 소멸을 허락하지 않는다잿더미 깊은 곳에 남은 불꽃이 있어나는 매일 문장의 형식을 빌려 유서를 쓴다그것은 종이의 마른 살결 위에 겨우 숨 한 모금을 얹어두는 일잉크가 푸른 멍처럼 번진 자리마다끝내 자전하지 못한 시간이 고여 있고,마침표의 벼랑에 이르면자꾸만 느린 보폭이 엉겨 붙는다차마 지우지 못한 단 한 줄이질기디질긴 칡넝쿨처럼 뻗어 나와내일의 목을 끌어당기고 있다아니, 칭칭 감는 중이다
불꽃의 기하학내 가슴의 안쪽에는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못한 날갯짓이 서식한다콩나물국에 허벅지를 데었던 유년의 흉터에서잔열은 뒤늦게 붉은 꽃의 골조를 복원해내고그 결을 따라 불꽃의 기하학이 다시 되살아난다비록 비상의 연대기는 끊겼을지라도존재의 진동은 심부에서 맥박을 고르며동심원의 파문으로 흉벽을 가볍게 타격한다문득날면서 추락하는 새는 있어도 날면서 죽는 새는 없다는어느 소설 속 문장의 서늘한 행간이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어둠 속에서 번뜩인다허공을 부유하던 하루가 뼈마디를 긁어낼 때나는 내 안의 헛헛한 날갯짓으로척박한 대기 위에 미세한 균열을 새긴다황혼의 조도가 낮게 가라앉는 저녁,그 울림은 휘발되지 않고 사물들의 모서리에 매달린 채발화 직전의 뜨거운 호흡처럼미처 열기가 식지 않은 채로 오래도록 내 몸의 궤적을 증명한다
공명의 방식입술을 떠나는 순간 산화하는 것들을기어이 종이 위에 붙잡아두고나는 그 진실의 숨을 남기려 한다하여 시를 쓰는 일은날이 갈수록 폐허로 변해가는 세상을 향해 조심스레 문을 두드리는 행위이며아무도 없는 빈방일지라도 누군가의 체온이 남아 있기를 바라며빈 의자에 말을 건네는 것과도 같다그러나 문장은 늘 골절된 채로 발설되고너라는 해안에 미처 닿기도 전 좌초하기에늘 절망의 벽 앞에 서곤 한다다만 미완의 뜻들이 너의 긴 침묵 사이에서가느다란 맥박으로 이어지길 기다리는나는 나의 결핍을 수선하지 않는다이것은 소통이라는 미명보다는끝내 가닿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허공을 휘젓는 처절한 손짓 또는 몸부림이며절대 포기할 수 없는 방향으로온전히 나를 밀어내는 투명한 동력이기 때문이다그리고 비로소 알게 된다종은 스스로 우는 법이 없다는 것을어둠의 배면을 치고 되돌아오는 미세한 전율이 있어나는 또다시 쓰게 된다는 것을그래서 오늘도 나는소리 없는 그 아우성들을 꾹꾹 눌러 담는다언젠가 너의 내벽에 닿아아주 작은 금이라도 낼 수 있기를 소망하며그때야 비로소 나의 비명은 생동하는 언어가 되고나의 침묵은 너의 가장 깊은 곳에서 떨리는 하나의 공명이 될 것임을 믿기에

  작가 소개

지은이 : 황원교
1959년 춘천 출생. 1996년 <충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으며, 2001년 <문학마을>로 등단했다. 시집 <빈집 지키기> <혼자 있는 시간> <오래된 신발> <꿈꾸는 중심> <0.23초> <아직도 시계탑 아래 서 있습니다>, 산문집 <굼벵이의 노래>, 장편소설 <나무의 몸>, 에세이 <다시 없을 저녁>이 있다. 제3회 청선창작지원 대상, 제5회 청주시인상을 수상했으며, 2022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도서에 선정되었다.

  목차

● 시인의 말

제1부

저물녘의 초상 10
저녁놀 속으로 부는 바람 12
묵염(默染) 14
느림의 미학 15
불꽃 16
사막의 벽 17
저녁의 사유 18
불꽃의 기하학 19
12월 20
쓰레기 소각장 앞에서 22
매일 쓰는 유서 23
그늘의 굳은살 24
숨의 분무기 25
삶을 견디는 방식 26
사랑과 시간의 함수관계 28

제2부

가죽 부대의 연대기 30
골밀도 3.4 31
21그램의 하중 34
M병원 314호실을 떠나며 36
라이프 마스크(Life Mask) 37
혀끝의 낭떠러지 38
얼음 가시 40
숨 쉬는 죄 41
호두과자를 먹으며 42
11월 44
슬픔의 초상 46
노인 48
설국의 아침 50
불비상(佛碑像) 앞에서 52
까마귀가 울고 간 겨울 아침 54

제3부

사소함에 대하여 56
대답으로 바꾸지 못한 말 58
오래된 음성 60
시간의 입구, 다른 쪽으로 기우는 62
개망초꽃 64
3월 26일 66
상당산성(上黨山城)에서 68
염낭거미 70
봄까치꽃 72
어머니의 기일(忌日) 74
봉쇄의 시간, 그 너머 75
울울창창해지는 것들 76
오리숲길 78
수레바퀴의 궤적에 대하여 80
나무, 침묵의 언어 82

제4부

공명의 방식 86
나는 지금 항해 중 88
독서 90
도도새 91
오래된 몸짓 92
비밀번호 94
물 한 방울의 파동 같은 96
코스모스(Cosmos) 일부 들여다보기 98
불규칙한 나의 그림자 100
봄비의 언어 102
다음 생을 위한 지도 104
시를 읽는 가을 저녁 106
봉합 108
꽃 110
분홍돌고래를 그리며 112

▨ 황원교의 시세계 | 송연숙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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