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2000년대 초, 국가 권력의 억압 속에서 ‘공복(公僕)’이라는 굴레를 벗고 ‘노동자’로 거듭난 하위직 공무원들의 치열한 성장과 연대의 기록이다.
민점기 작가는 공무원 노동운동을 문학적으로 복원한다. 1999년 직장협의회 출범부터 2004년 총파업까지, 한국 현대사의 역동적 전환점이었으나 문학적으로는 미개척지였던 ‘공무원 노동운동’의 태동기를 내부자의 시선으로 생생하게 그려낸다.
이 소설은 ‘철밥통’이라는 사회적 편견 뒤에 가려진 하위직 공무원들의 고뇌와 성장을 담았다. 과거 선배들의 희생이 오늘날 공직사회의 권리 의식에 어떤 뿌리가 되었는지 보여주면서 전 세대를 아우르는 공감대를 이끌어낸다.‘우리가 왜 노동자야? 법령에 따라 움직이고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공무원이지.’ 검정 사인펜 촉이 하얀 종이 위를 거칠게 문질렀다. ‘노’라는 글자의 머리가 뭉개지고, ‘동’의 이응이 시커먼 잉크 속에 잠겼다. 그 위에 꾹꾹 눌러 쓴 ‘근로자’라는 글씨는 덧칠된 잉크 때문에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그러나 덧칠된 검은색 너머로 여전히 ‘노동자’라는 글자의 획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그의 눈을 찔렀다. 수련회를 가기 위해 속속 모여든 간부들이 그의 사인펜 덮어쓰기 작업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워진 이름, 노동자 중에서
한 손씩 차례로 내밀고, 두 손을 연거푸 찌르고, 한 팔씩 뻗어 올린 후 머리 위에서 손뼉을 두 번 치는 ‘지게차 율동’은 간단해서 금방 손에 익었다. 무거운 하중을 견뎌내며 적재물을 들어 올리는 지게차의 강인한 갈퀴처럼, 두 팔을 허공으로 힘껏 뻗어 올리는 그 동작은 수십 년간 공직사회를 짓눌러온 낡은 관행과 침묵의 무게를 단숨에 걷어차 올리는 해방의 몸짓이었다.- 팬티가 젖은 줄도 모르고 중에서
수강은 월급 명세서 위에 선명하게 찍힌 ‘노조 건설 기금 10,000원’을 읽으며 가슴이 북받쳤다. 1만 원. 누군가에겐 술 한 잔 값이지만, 수만 명의 결의가 모이면, 이 돈은 ‘공무원노조’라는 기관차를 움직일 연료가 될 것이었다. 그리고 원천징수 동의서와 함께 받은 노조 결성 서명은 국가의 ‘관리 대상’에서 스스로가 ‘행정의 주인’으로 거듭나겠다는 하위직 공무원들의 주권 선언이기도 했다.- 신당동 2번 출구 중에서
작가 소개
지은이 : 민점기
공무원노조 초대 전남본부장, 2대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공무원 정치 자유 선언과 총파업 건으로 해직됐다. 현재 공무원노조 퇴직 조합원이다. 시집으로 「직립보행」 등이 있다.
목차
촛불잔치
지워진 이름, 노동자
입술만 달싹인 노래
용지의 파동, 금기를 넘어서
모시 적삼과 반팔 조끼
팬티가 젖은 줄도 모르고
자갈마당의 트라이앵글
불어 올리자, 서남풍
붉은 머리띠를 두른 가을 소풍
인센티브의 덫
자굴에서 두륜까지
신당역 2번 출구
찰나의 깃발, 영원한 선언
집들이 마당의 활극과 촌극
붉은 능선, 푸른 넋
오월의 깃발과 거부된 시험지
붉은 함성과 잿빛 폭풍
싸울아비들의 행진
어둠 속의 포위망, 흩어지지 않는 대오
천막교실의 약속
살 꽃처럼 피어나는 붉은 마음들
해임 날개라도 단 듯이
텅 빈 백비에 새긴 고해성사
수신 불능 번호를 지우며
웃물을 바꿔야
낫을 벼리는 시간
노천극장의 전사들
궤도를 이탈한 밤
보이지 않는 올가미
엇갈린 결의, 멈추지 않는 파업 투쟁
찢긴 깃발, 꺾이지 않는 사람들
겨울을 뚫고 솟는 청보리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