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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가 긴 빗방울
청색종이 | 부모님 | 2026.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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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소개

안주철 시인의 새 시집 『다리가 긴 빗방울』은 빗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혼잣말이 오래 이어지는 듯한 시집이다. “안녕하세요? 너무 작아서 들리지 않나요?”라고 묻는 목소리는 가까이 다가오는 듯하면서도 끝내 정확히 들리지는 않고, 시는 그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의 리듬 위에 오래 머문다. 이 시집에서 비는 추락하지 않고, 사물과 존재 곁에 오래 머물기 위해 속도를 늦춘다.

시집에는 폐허와 하강의 감각, 그리고 삶을 견디는 육체의 피로가 짙게 깔려 있다. 그러나 무너짐을 비극적으로 과장하지 않고 생활처럼 받아들인다. “피로를 겹겹이 쌓아 올리면서/ 간신히 빈곤을 벗어날 수 있었지”라는 문장처럼, 거창한 절망보다 생활의 남루함과 흐릿한 감정들이 천천히 스며든다.

힘 빠진 농담과 생활의 사소한 장면들은 시집 전체를 과도한 비장함으로부터 구해낸다. 사랑은 “손이 닿지 않는 곳을 사랑하게 합니다”라는 문장처럼 멀리 있고 흐릿하며, 어둠은 공포가 아니라 은신처에 가깝다. 과장된 감정을 밀어 올리지 않고 생활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오래 망설이는 시. 『다리가 긴 빗방울』은 작은 빗소리와 희미한 감정들을 끝내 시의 자리까지 밀고 가는 성취를 보여준다.

  출판사 리뷰

안주철 시인의 새 시집 『다리가 긴 빗방울』이 출간되었다. 이 시집을 읽고 있으면 빗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혼잣말이 오래 이어지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 말들은 또렷한 결론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질문을 던졌다가 금세 흐려지고, 농담을 하려다가 다시 침묵 속으로 물러난다. “안녕하세요? 너무 작아서 들리지 않나요?”라고 묻는 목소리는 가까이 다가오는 듯하면서도 끝내 정확히 들리지는 않는다. 그의 시는 바로 그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의 리듬 위에 오래 머문다.

이 시집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것은 비와 어둠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우울을 장식하기 위한 배경이 아니다. 비는 세계를 세게 내리치는 대신 조심스럽게 매만지려는 물질처럼 보인다. 표제작 「다리가 긴 빗방울」에서 빗방울들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단을 내려오고” 있다. 그의 시에서 비는 추락하지 않는다. 서두르지 않는다. 사물과 존재 곁에 오래 머물기 위해 속도를 늦춘다. 그래서 빗방울은 상처를 파고드는 물이 아니라 상처 주변을 서성이는 물에 가깝다.

최진석 평론가가 해설에서 말했듯 이 시집에는 폐허와 하강의 감각이 짙게 깔려 있다. 실제로 시집 속 화자들은 자주 무너져 있다.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온몸이 우르르 쏟아질 것 같은 저녁”이라거나 “누군가 뒤에서 제 이름을 불러도/ 돌아설 힘이 없어요” 같은 구절에서는 삶을 견디는 육체의 피로가 느껴진다. 그러나 시는 무너짐을 비극적으로 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무너진 상태를 생활처럼 받아들인다. “피로를 겹겹이 쌓아 올리면서/ 간신히 빈곤을 벗어날 수 있었지”라는 문장은 이 시집 전체를 떠받치는 정서에 가깝다. 거창한 절망보다 생활의 남루함이 더 자주 등장하고, 그 남루함은 천천히 스며든다.

흥미로운 것은 이 무력감이 이상하게도 사람을 편안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시의 화자들은 더 이상 세계를 이기려 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을 조금씩 줄이고 흐린 존재가 되려 한다. 「야간 산책」에서 “단 한 번도 사람이었던 적이 없었거든”이라고 말하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는 재빨리 자신을 지우고, 개나 고양이 앞에서는 고양이 울음소리처럼 쭈그려 앉는다. 이 낮아짐은 패배라기보다 선택에 가깝다.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는 대신 가장 작은 존재들과 비슷한 높이로 내려가는 일. 시는 그 낮은 자리에서 비로소 다른 존재들의 체온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 시집의 또 다른 특징은 질문이 많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 질문들은 답을 얻기 위해 던져지는 질문이 아니다. “왜 비가 내려요?”, “행복하냐구요?”, “당신은 누구세요?” 같은 문장들은 상대에게 묻는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시는 계속해서 말을 걸지만, 어떤 확신에 이르지 않는다. 그 흔들리는 상태 자체가 시의 호흡이 된다. 그래서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누군가 혼잣말을 하다가 갑자기 창밖을 오래 바라보는 모습이 떠오른다.

안주철 시인의 시에는 자꾸 힘 빠진 농담과 생활의 사소한 장면들이 끼어든다. “배꼽이 눈송이를 닮았다 쓰려다가/ 픽 웃고 그만둡니다” 같은 문장이나, 전기구이 통닭을 만지며 “식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장면, 빗방울의 날개를 바라보며 멍하니 창밖을 보는 순간들. 이런 장면들은 시집 전체를 과도한 비장함으로부터 구해낸다. 삶의 고통을 말하면서도 그 고통을 거대한 비극으로 만들지 않고, 오히려 우울 속에서 슬쩍 옆으로 새는 농담이야말로 이 시집의 고요한 힘이다.

사랑 또한 이 시집에서는 뜨겁게 선언되지 않는다. 사랑은 늘 멀리 있고 흐릿하다. “손이 닿지 않는 곳을 사랑하게 합니다”라는 문장처럼, 그의 사랑은 가까이 끌어안는 감정보다 거리를 견디는 감각에 가깝다. 그래서 시집에는 “먼 남쪽”, “먼 북쪽”, “여행이 되는 곳” 같은 표현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사랑은 가까이 붙드는 일이 아니라 닿지 않는 곳을 오래 바라보는 일이 된다.

안주철 시인의 시를 읽고 있으면 자꾸 어둠이 손에 만져지는 물질처럼 느껴진다. “창문 밖의 어둠이 트럭에 실려 있다는 생각”이나 “물기가 많은 어둠” 같은 표현들 때문일 것이다. 이 시집의 어둠은 공포가 아니라 은신처에 가깝다. 밝은 낮의 질서 속에서는 견디기 어려웠던 사람들이 밤이 되어서야 겨우 숨을 돌린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밤 산책과 새벽 골목과 하천의 물소리가 자주 등장한다. 시의 화자들은 환한 곳보다 흐린 곳에서 더 오래 살아남는다.

최근 한국 시단에는 생활의 깊이를 통과하지 않은 문장들이 빠르게 소비되곤 한다. 자기 고백은 넘쳐나지만 정작 한 줄의 체온도 남기지 못하는 시들도 적지 않다. 그런 흐름 속에서 안주철 시인의 시는 드물게 말의 속도를 늦춘다. 과장된 감정을 밀어 올리지 않으며, 생활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오래 망설인다. 그래서 그의 시는 낮은 목소리로 읽히지만 쉽게 소모되지 않는다. 작은 빗소리 하나, 고양이의 발자국 하나, 하천 위 물결 하나를 끝까지 바라보는 힘. 그것은 감수성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를 대하는 태도다.

큰 목소리 대신 빗소리 같은 크기로 오래 남는 시. 상처를 과장하지 않고, 절망을 장식하지 않으며, 생활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끝내 감각을 포기하지 않는 시. 최근 한국 시단에서 이토록 낮은 목소리로 깊은 파문을 남기는 시인은 드물다. 『다리가 긴 빗방울』은 작은 사물과 희미한 감정들을 끝내 시의 자리까지 밀고 가는 드문 성취다.

비가 그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또 비가 내렸으면 하는

마음이 생겨요

기도를 하지 않았는데 상자 모양의 선물이 있어요
꺼내지 않아도 마음인지 알고요

다시 비가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다리가 긴 빗방울들이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걸까요

혼자 웃고
또 혼자 웃으면
단란한 혼자가 되기도 합니다

창문 너머의 흐린 날씨를 방충망을 통해 보고 있어요
흐린 날씨도 방충망으로 보면 촘촘하네요

내려오는 계단이 올라가는 계단과 같을 텐데
한 번 내린 비는 다른 계단으로 걷고 있는 듯해요
아주 작은 소리까지 주워 가면서

하루 종일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제 스스로 절벽이 되는 듯해요

제가 쌓아 올린 절벽에서 떨어져
이 세상에서 한 번도 구경하지 못한 세계를 엿볼 수 있을까요?

오늘은 팔이 길어지지 않아서 밥을 차려 먹지 않았어요
다리가 짧아져서 일어나는 일도 큰일이 되어 버렸고요

한강을 걸어갔다 왔으면 좋겠는데

다리가 긴 빗방울들이 천천히 하늘을 내려오는 생각에 갇혀 있어요
밤에 팔이 조금 길어지면 창문을 닫으려고 해요

― 「다리가 긴 빗방울」


캄캄하다
겨울이다

가진 만큼만 사랑하거나 버리지 못한 만큼만 사랑하거나

나는 내 안에 없다

구름을 한참 바라보다가 가로수를 보고 있으면
가로수도 구름인 듯하다 푸른 구름

조금 느리게 흘러가는
부스러기가 조금 많이 남는 구름

생은 참혹할 만큼 잡스럽다

굴참나무 군락지 위로 뜨는 별들을 보면
엄지손톱으로 꾹꾹 눌러서 터뜨리고 싶다

때로 심술이 희망이 되기도 한다
미움이 사랑하는 힘과 다르지 않듯이

캄캄한 하늘에 노랗게 익은 종기들
별빛들이 꼭 어둠의 눈 같기도 하다

손가락 끝으로 어둠의 눈을 콕 찌르고 싶은 바람이 차가운 밤이다

아기 고양이들이 사료를 씹는 소리가 들리고 열어 놓은 창문으로 찬바람이 십오 톤씩 들어온다

사랑은 없다

멀리 미국에서 사람들이 모여 구호를 외치며 걷는 모습을 보면서
미국과 미국인을 곰곰이 다시 생각하고 있다

나에게 사랑이 없다고 모두에게 사랑이 없다고 말할 자신은 없지만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미국이 왜 갑자기 가보고 싶은지 모를 일이다

미국이 다른 미국으로 보이는 것도 다 사람 때문이다

미워하는 것도 사랑의 일부임에 틀림이 없고
무관심도 사랑이 지나간 황폐한 사막임에 틀림이 없다

내 안에 사랑이 없어서 캄 캄 하 다

내 안에 사랑이 없다고 모두 없다고 딱 잘라 말할 자신은 없지만
밭에서 파 몇 뿌리를 뽑아 들고 굴참나무 군락지를 바라보면

나라는 구름도 오래지 않아 흘러가기 시작하겠지

사랑해

내 안에 사랑은 없지만

― 「내 안에 사랑은 없지만」

  작가 소개

지은이 : 안주철
1975년 강원도 원주 출생. 2002년 제2회 창비신인시인상을 수상하며 활동 시작. 시집 『다음 생에 할 일들』 『불안할 때만 나는 살아 있다』 『느낌은 멈추지 않는다』 『다리가 긴 빗방울』 등이 있음.

  목차

시인의 말


저 구름은 몇 번째 계단인가요
여행이 되는 곳으로
먼 곳이 열릴 거 같아요
함부르크
다리가 긴 빗방울
모르고 지나칠 수 있어요
여름의 꽃
몰래 대답하고 혼자 웃어요
우중 산책
봄밤 아래서
피로
바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녁의 숲
물의 꽃잎
봄밤입니다


새 떼는 날지 않는다
불행만큼 행복이 쉬운 날도 있습니다
등이 열린 사람
비는 걷고 있어요
작은 하늘이 날고 있어요
사랑할 수밖에 없는 밤
소원 주위를 빙빙 도는 삶
다시 내 안에 들어와서
냉동 연어
아름다운 슬픔
물이 뚝뚝 떨어지는 밤 속에서
열 손가락 다시 열 손가락
얇고 단단한 저녁
질문을 해도 괜찮습니다
고양이의 숲


여름비의 열 손가락
바닥이 짚어지지 않았다
불행
통통이와 나
봄이 올 것 같은 밤이에요
야간 산책
고양이 구름
거품 구름이 흘러가고

고양이의 우주
창문 밖에 트럭이 서 있어요
새벽을 열어 주세요
신의 벽돌
나를 이 세상에 살게 하는 사랑
사랑이면 좋겠어요


빗방울 속에서
함부르크
여름밤입니다
반복
천변 산책
폐허의 무늬
건너지 못하는 인사
입술
피로의 활용
쓸쓸하다
바로 보지 못하는 것들
봄날
어슬렁거리는 기억
사막을 심는 가족
불안
내 안에 사랑은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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