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중국 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문호 동파 소식은 문학뿐 아니라 서예, 회화, 요리, 토목에 이르기까지 전 방위에서 최고 경지에 오른 거장이었다. 평생 소동파를 연구해 온 서울대 류종목 명예교수가 그의 삶과 문학을 소개한다. 소동파는 형식미를 탈피한 명문장과 호방사풍(豪放詞風)으로 '문학의 해방'을 이끌었으며, 고려의 김부식·이규보가 흠모할 만큼 동아시아 전체의 문학적 우상이었다. 참혹한 유배길을 창작의 촉매로 삼은 그는 백성을 위해 소제(蘇堤)와 병원을 세우고 요리를 개발하며 따뜻한 인간미를 전했다. 세파 속에서도 유머와 초월적 인생관을 잃지 않은 그의 불멸하는 궤적은 현대인에게 삶을 사랑하고 승화하는 길을 안내한다.
출판사 리뷰
영생 불멸의 팔방미인 소동파
동서고금을 통틀어 한 사람이 문학과 예술의 전 영역에서 모두 최고의 경지에 오른 사례가 또 있을까? 당송 팔대가의 으뜸가는 문장가이자 송대 시풍의 확립자, 호방사파(豪放詞派)의 창시자, 그리고 북송 4대 서예가, 문인화의 거장, 유학자, 토목건축가, 그리고 동파육을 탄생시킨 요리사까지. 《소동파 전기》는 파란만장한 유배의 고난을 위대한 예술로 승화시키며 1000년 넘게 살아 숨 쉬는 거장 동파 소식의 삶과 문학을 완벽하게 복원한 결정판이다.
소동파의 문학사적 가치는 유행하던 형식미를 깨부수고 자유로운 내면을 토로한 '문학의 해방'에 있다. 당대 문단의 맹주 구양수가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어야겠다"며 땀을 흘렸고, 신종 황제조차 밥상을 물리고 탄복했던 그의 명문장은 〈적벽부〉로 완성되었다. 그는 3000여 수의 시를 통해 송시(宋詩)의 궤도를 정립했으며, 음률에 갇혀 있던 노래 가사 '사(詞)'에 시적 기법과 호방한 기상을 불어넣은 '이시위사(以詩爲詞)'를 통해 사(詞)를 최고의 서정시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의 문명(文學名)은 중국에 그치지 않았다. 요나라 사신이 그 시를 읊조렸고, 고려의 김부식·김부철 형제는 소동파·소철 형제의 이름에서 본명을 따왔다. 이규보가 "과거 방이 붙으면 매년 서른 명의 소동파가 새로 나온다"고 탄식하고 김종직이 "고려 중엽에는 오로지 소동파 시만 배웠다"고 증언했듯, 그는 동아시아 전체의 문학적 우상이자 정신적 지주였다.
소동파의 삶은 말 그대로 고난과 유배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황주, 혜주, 담주로 이어진 참혹한 유배길은 그에게 절망이 아닌 위대한 창조의 촉매가 되었다. 그의 천재성은 사대부의 서재에만 갇혀 있지 않았다. 백성을 위해 제방을 쌓아 항주 서호의 명물 소제(蘇堤)를 만들었고, 최초의 민간 병원 안제방을 세워 자재를 털어 병자를 치료했다. 주량은 고작 술 반 되에 불과했으나 남이 술 마시는 모습만 봐도 행복해하며 직접 미식과 요리를 개발했던 인간적인 풍모는 1,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깊은 울림과 친근함을 준다.
정치적 모함과 세파 속에서도 유머와 초월적 인생관을 잃지 않았던 삶의 예술가. 이 책은 시와 문학, 예술과 생활 속에서 끝내 최고의 꽃을 피워낸 소동파의 불멸의 궤적을 추적하며, 격동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어떻게 삶을 사랑하고 승화시킬 것인가에 대한 명쾌한 답을 제시한다.
*소동파의 작품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분께는 지식을만드는지식에서 출간한 《소동파 시선》, 《소동파 사선》, 《소동파 산문선》을 추천합니다.
*소동파와 송대 시사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분께는 지식을만드는지식에서 출간한 《구양수 사선》, 《왕안석 시선》, 《황정견 시사선》, 《진관 사선》, 《진사도 시선》을 추천합니다.
소순은 아들들을 가르치면서 매우 엄격하게 대했지만 소동파의 영리함에 내심 만족하고 있었다. 하루는 소동파에게 〈하후태초론(夏侯太初論)〉이라는 제목을 주면서 문장을 지어 보라고 했다. 아들의 재주를 시험, 아니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소순은 소동파가 지은 이 문장 중 “사람이 천금짜리 벽을 부술 수 있을지라도 가마솥 깨지는 것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없고, 사나운 호랑이를 때려잡을 수 있을지라도 벌이나 전갈을 보면 안색이 바뀌지 않을 수 없다”라는 구절을 보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소순은 아들들에게 형식만 번지르르하고 내용이 없는 글을 억지로 짓지 말라고 했다. 세상의 잘못을 정확하게 꼬집어 날카롭게 비판하는 실용적인 글이 훌륭한 글이라고 가르쳤다. 소동파는 아버지의 이 가르침을 20여 년이 지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부역선생문집서(鳧繹先生文集敍)〉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옛날에 나의 선친께서 도성으로 가서 여러 대신과 교유하다가 돌아와서 나에게, ‘지금 이후로 문장은 날로 아름다워지겠지만 도(道)는 없어질 것이다. 선비들이 먼 것만 흠모하고 가까운 것은 소홀히 하며 꽃을 귀하게 여기고 열매는 천대하니 나는 이미 그 조짐이 보인다”라고 하시고는 노 지방 사람인 부역[안태초(顔太初)] 선생의 시문 열 편을 보여 주시면서, “얘야, 이것을 기억해 두어라. 앞으로 수십 년 동안 천하에 다시는 이런 글을 짓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선생의 시문은 모두 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서 지은 것으로, 날카롭고 굳세고 적확하고 절실하며, 그분의 말은 꼭 당시의 잘못을 꿰뚫고 있다. 정확하기는 오곡이 틀림없이 배고픔을 고치는 것과 같고 단호하기는 약석(藥石)이 틀림없이 병을 물리치는 것과 같다. …’라고 하셨다. 그 뒤 20여 년이 지난 지금 선친은 이미 돌아가셨건만 그 말씀은 남아 있다.“
〈2-1. 당돌한 신통〉에서
상황이 급박해지자 성안에 사는 유지들이 앞을 다투어 성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위기의식을 느낀 소동파가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유지들이 성을 빠져나가면 민심이 동요할 터인데 그렇게 되면 내가 어떻게 이 성을 지키겠소? 내가 있는 한 절대로 성이 무너지도록 놓아두지 않을 것이니 나를 믿으시오.”
유지들에게 성안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내린 뒤 소동파는 즉시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지휘봉 삼아 작대기 하나를 들고 군부대로 달려가서 협조를 요청했다. 태수가 작업복 차림으로 달려온 것을 본 병사들은 너도나도 자진해서 삽과 괭이를 들고 태수의 뒤를 따랐다.
태수가 이렇게 발 벗고 나서자 노인들이 옛날에 제방을 쌓아 수재를 막은 일이 있었다고 귀띔을 해 주었다. 소동파는 자진해서 따라온 병사들과 급히 모은 5000여 명의 인부를 지휘해 노인들의 제안에 따라 서주성 남쪽에 있는 희마대(戱馬臺)에서 성곽까지 길이 약 3킬로미터, 높이 약 3미터, 두께 약 6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제방을 쌓았다. 그리고 빈 배를 모두 끌고 와서 성 밑에 매라고 지시했다. 물이 직접 성벽에 부딪치면 충격이 너무 크기 때문에 충격을 완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계속해서 큰비가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공사를 끝내기 위해 제방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소동파는 밤낮없이 성 위에서 공사를 지휘했다. 잠도 성 위에서 잤다.
고생한 보람이 있어 9월 21일에는 수위가 약 9미터에 이르렀지만 이때는 이미 제방이 완성된 뒤였기 때문에 성곽은 안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뒤에도 비는 계속 내려 수위가 낮아지지 않다가 10월 5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물이 조금씩 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10월 13일에 전연 지방에 한바탕 폭풍이 불고 나서 황하가 원래의 물길을 회복했다. 이로써 70여 일에 걸친 수마의 위협이 끝났다. 소동파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얼른 〈황하가 물길을 회복해(河復)〉라는 시를 지어서 길을 가다가도 흥얼거렸다.
〈5-3. 넘치는 강물을 몸으로 막은 서주지주(徐州知州)〉에서
마몽득은 소동파가 봉상부첨판으로 부임해 갈 때 그를 따라가서 그의 막료가 된 적이 있지만 그 뒤로는 각지를 유랑하느라 서로 만난 적이 없었는데 이러한 마몽득이 소동파를 찾아왔다가 그의 딱한 사정을 알고는 황주 관아에 부탁해 그에게 수십 마지기짜리 황무지 한 뙈기를 얻어 주었다. 원풍 4년(1081) 2월의 일이었다. 이 땅은 황주성에서 동쪽으로 100여 보 정도 떨어진 산비탈에 있는 옛날 군사 주둔지로 당시에는 그냥 묵혀 놓고 있던 것을 마몽득이 와서 보고 황주 관아에 부탁하게 된 것이다. 〈동파를 노래한 여덟 수(東坡八首)〉의 서문에 저간의 사정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내가 황주에 도착한 이듬해에 날마다 살기가 어려워졌다. 친구 마정경(마몽득)이 내가 밥도 제대로 못 먹는 것을 슬퍼한 나머지 나를 위해 군청에 부탁해 옛날 군사 주둔지 수십 묘를 얻어 주어 그 안에서 몸소 농사지을 수 있게 해 주었다. 그 땅은 오랫동안 버려져 있어서 가시덤불에 덮인 자갈땅이 된 데다 큰 가뭄까지 들어 개간하느라 근력이 거의 다 소진되고 말았다. 이에 쟁기를 놓고 탄식하며 이 시를 지어 스스로 자신의 수고를 위로하고 내년의 수입을 기대함으로써 노고를 잊으려 한다.”
소동파는 갖은 고생을 다 해 가며 간신히 개간한 이 황무지에 ‘동파(東坡)’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1년 뒤에는 ‘동파거사(東坡居士)’라는 자호(自號)를 짓기까지 했다. 본명보다도 훨씬 더 잘 알려져 있는 그의 호는 바로 여기에서 비롯했다. 그가 자신의 농장 명칭과 호로 사용한 이 ‘동파’라는 이름은 물론 황주성 동쪽에 있는 산비탈이라는 뜻에서 나온 것이지만 여기에는 세속적인 욕심을 버리고 초연한 심경으로 만년을 보낸 백거이에 대한 흠모도 적지 않게 작용했음에 틀림없다.
백거이에게는 “돈으로 꽃나무를 사 갖고 와서, 성 동쪽의 산비탈에 심어 놓았다”라고 한 〈동쪽 산비탈에 꽃을 심어 놓고(東坡種花)〉와 “아침에 동쪽 산비탈에 올라가서 거닐고, 저녁에 동쪽 산비탈에 올라가서 거닌다”라고 한 〈동쪽 산비탈을 거닐며(步東坡)〉 등 충주성 동쪽의 산비탈에 대한 애착을 노래한 시가 일곱 수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일찍이 남송 때 홍매(洪邁, 1123∼1202)가 이미 “소 공(소동파)은 황주에 유배되어 있을 때 처음으로 자신을 동파거사라고 불렀거니와 그 의미를 자세히 생각해 보건대 아마도 한마음으로 백낙천(백거이)을 흠모해서 그런 것 같다”라고 추론한 적이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소동파는 손수 개간해 스스로 이름 붙이고 나아가 그것을 자신의 호로 삼기까지 한 동파에 특별한 애착을 가졌다. 동파가 있음으로 인해 그는 황주 생활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었고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7-2. 물 하나는 마음껏 마시게 됐네〉에서
작가 소개
지은이 : 류종목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대구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와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다. 주요 저서 및 역서로 《소식 사 연구(蘇軾詞硏究)》, 《당송사사(唐宋詞史)》, 《여산진면목(廬山眞面目)》, 《논어의 문법적 이해》, 《송시선(宋詩選)》, 《한국의 학술연구?인문사회과학편 제2집》, 《범성대 시선(范成大詩選)》, 《육유 시선(陸游詩選)》, 《소동파 시선》, 《소동파 사선(蘇東坡詞選)》, 《소동파 사(蘇東坡詞)》, 《당시삼백수(唐詩三百首)》 1·2, 《정본 완역 소동파 시집》 1·2·3·4·5, 《중국고전문학정선?시가》 1·2, 《중국고전문학정선?시경 초사》, 《중국고전문학정선?사곡(詞曲)》, 《소동파 산문선》, 《소동파 문학의 현장 속으로》 1·2, 《원서발췌 송사삼백수》, 《유종원 시선(柳宗元詩選)》, 《소식의 인생 역정과 사풍(詞風)》, 《한시 이야기》, 《소동파 전기 명시》, 《소동파 후기 명시》, 《유종원 산문선》 등이 있다.
목차
개정판 출간에 부쳐
머리말
제1장 가계와 출생
1. 가계(家系)
2. 출생
제2장 소년기와 청년기
1. 당돌한 신동
2. 연오산(連鰲山)과 환어지(喚魚池)
제3장 과거 보러 개봉(開封)으로
1. 장방평(張方平)과의 만남
2. 수석 합격 못한 까닭
3. 어머니의 별세와 첫 번째 귀향
제4장 벼슬 초년생
1. 봉상(鳳翔)으로의 첫 부임
2. 희우정(喜雨亭)과 능허대(凌虛臺)
3. 아버지의 별세와 마지막 귀향
제5장 자청해서 지방으로
1. 항주로의 도피
2. 초근목피로 연명한 밀주지주(密州知州)
3. 넘치는 강물을 몸으로 막은 서주지주(徐州知州)
제6장 오대시안(烏臺詩案)
1. 모함과 트집
2. 체포와 투옥
제7장 황주(黃州)에서의 유배 생활
1. 고기가 살지고 죽순이 맛있겠네
2. 물 하나는 마음껏 마시게 됐네
3. 〈적벽사(赤壁詞)〉와 〈적벽부(赤壁賦)〉
4. 동파육(東坡肉)
5. 황주와의 작별
제8장 여주(汝州)로의 이동과 상주(常州) 은거
1. 여산진면목(廬山眞面目)
2. 왜 석종산(石鐘山)인가
3. 은거지를 찾아서
4. 며칠 동안의 은거
제9장 사면과 복권 그리고 귀경
1. 6년 만에 되찾은 자유
2. 초고속 승진
3. 낙촉당쟁(洛蜀黨爭)
4. 조정을 떠나려는 필사적 노력
제10장 다시 지방으로
1. 다시 찾은 항주
2. 고려에 대한 불신과 증오
3. 염량세태
4. 영주(潁州)와 양주(揚州)
5. 마지막 도성 생활
6. 남도북이(南稻北移)와 〈정주앙가(定州秧歌)〉
제11장 대유령(大庾嶺) 넘어 영남(嶺南)으로
1. 영주(英州)를 거쳐 혜주(惠州)로
2. 42년 만의 화해
3. 길이길이 영남 사람 되는 것도 괜찮겠네
제12장 바다 건너 담주(州)까지
1. 영남에서 만난 형제
2. 화도시(和陶詩)
3. 춘몽파(春夢婆)와 〈동파입극도(東坡笠圖)〉
4. 돌아가는 길
5. 변화하는 사람을 놀라게 하지 마라
제13장 영생하는 팔방미인
1. 팔방미인
2. 영생 불사
소동파 연보
인용 시문 찾아보기
지은이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