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누구도 쓰라 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들은 썼다.
이솝에서 볼드윈까지, 열일곱 명의 작가가 말한다, “당신도 쓸 수 있다. 옳게 쓸 수 있다!” 인간의 ‘읽고 쓴다’는 능력, 곧 언어 장악력이 계급 이슈와 연결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서양에서는 라틴어, 동양에서는 한자가 바로 그 권력을 뒷받침해준 언어였다. 이 문자들을 익히는 데만 수년, 길게는 평생이 걸렸던 탓이다. 게다가 그 시간을 벌어줄 여유—노동에서 면제된 시간, 개인 교사, 값비싼 종이와 필기구, 책이 꽂힌 독립된 방—를 가진 사람은 소수의 지배층뿐이었다. 라틴어는 교회와 법정의 언어였고, 한자는 과거(科擧)와 관료제의 언어였다. 문자를 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신과 법과 국가에 접근할 자격을 뜻했다. 노예에게는 애초 배울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고, 여성에게는 배울 필요가 없다는 편견이 고착되었으며, 노동자와 식민지인에게는 배운다 해도 쓸 곳이 없다는 좌절감이 있었다. 읽고 쓴다는 것은 이처럼 재능의 문제가 아니라 자격의 문제로 치부되었다. 현대인이 볼 때는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역사에는 분명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자격 없다’고 여겨지던 그 자리에서 누군가는 썼다. 배워서 쓴 것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썼다. 이솝은 노예로 팔려 다니며 말을 잃은 자리에서, 사포는 여성의 욕망이 언어가 될 수 없던 시대에, 디킨스는 열두 살 구두약 공장 노동자의 자리에서 썼다. 우리는 이 이름들을 이미 안다. 『이솝 우화』를, 『돈키호테』를, 『올리버 트위스트』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들이 정확히 어떤 밑바닥에서, 무엇에 맞서며 글을 썼는지는 알지 못한다. 문학사는 그들의 이름은 남겼지만, 그들이 서 있던 자리는 슬그머니 지워버렸다. 『표준어 바깥에서』는 바로 그 지워진 자리를 복원하는 책이다. 저자 박홍규는 “이 열일곱 명의 작가가 ‘유명해서’가 아니라 원래는 글을 쓸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은 자리에서 글을 써냈기 때문에 다시 읽혀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은 세계문학사를 빛낸 작품이 아니라 “누가, 어떤 글을, 어디에서 썼는가”의 관점에서 다시 배열한 열일곱 편의 작가론이다. 이 책이 제목에 ‘표준어’라는 단어를 쓴 이유도 여기에 있다. 표준어는 단지 맞춤법에 맞는 말이 아니라 그 시대마다 지배계급이 정하고 관리해 온 언어를 가리킨다. 라틴어와 한자가 그러했듯, 표준어 역시 누가 말하고 쓸 자격이 있는지를 가르는 기준으로 작동해 왔다.
계급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름을 바꿨을 뿐!신분과 성별에 따라 문자 접근이 갈렸던 시대는 끝났다고 흔히 말한다. 그러나 형태만 바뀌었을 뿐 그 구조는 여전히 작동한다. 과거에 라틴어 교사와 값비싼 종이가 계급을 갈랐다면, 오늘날에는 이른 나이부터 쌓인 독서량과 값비싼 사교육, 정교하게 다듬어진 논술 훈련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실제로 한 조사는 대치동 아이들의 문해력과 독해력이 다른 학군의 아이들보다 월등히 높다는 결과를 내놓았다. 라틴어를 익힐 시간과 돈이 있던 사람만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처럼, 지금은 사교육과 문화자본에 접근할 수 있는 아이들이 더 정교한 문장을 갖는다. 다른 점이 있다면, 과거에는 그 장벽이 신분과 성별이라는 이름으로 노골적으로 드러났고 지금은 ‘노력’과 ‘재능’이라는 이름으로 은폐된다는 것뿐이다. 태어날 때부터 더 많은 책과 언어, 더 많은 훈련 속에서 자라는 아이가 있고, 그 바깥에서 출발하는 아이가 있다. 보이지 않는 계급은 여전히 문장 속에 숨어 있다. 오늘의 문해력 격차는 결국 근대 이전 문자 권력의 재판(再版)이다. 『표준어 바깥에서』의 저자가 2,500년 전 이솝부터 다시 불러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솝과 사포, 디킨스가 겪어낸 ‘자격 없음’의 자리가 오늘의 문해력 격차와 본질적으로 같은 구조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즉 이 책은 옛 작가들의 뒷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 사회가 누구에게는 쓸 자격을 허락하고 누구에게는 허락하지 않는지를 되묻기 위한 장치다. 2,500년의 시차를 두고도 같은 질문이 반복된다는 사실이야말로 ‘표준어 바깥에서’ 태어난 이 문장들을 지금 다시 읽어야 할 이유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열일곱 개의 대답 이 책이 내놓는 답은 거창하지 않지만 분명하다. 자격이 없다고 믿었던 자리에서도 쓰는 행위 자체가 그 자리를 벗어나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노예로 팔려 다니며 말을 잃었던 이솝은 동물의 입을 빌려 우화를 남겼는데 그것들은 2,500년 뒤에도 읽히고 있다. 사포는 남성의 언어 안에 갇혀 있던 여성의 욕망을 최초로 시로 옮겼다. 구두약 공장에서 하루 열 시간씩 일하던 열두 살 소년은 그 경험을 잊지 않고 『올리버 트위스트』로 되살려 찰스 디킨스라는 빛나는 별이 되었다. 안데르센은 구두 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나 지독한 가난 속에서 동화를 썼다. 정비공으로 청년기를 보낸 주제 사라마구는 쉰여덟이 되어서야 자신만의 문장을 완성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다섯 아이를 키우며 청소노동을 하던 스웨덴의 마이아 에켈뢰브는 양동이를 내려놓은 밤마다 일기를 썼고, 그 일기는 훗날 한 권의 책이 되었다. 식민지 조선에서 머슴의 딸로 태어나 후처의 자식으로 자란 강경애는 여공과 소작농의 삶을 처음으로 문학 안에 들여놓았다. 제임스 볼드윈은 가장 사적인 상처, 흑인이자 소수자로서 겪은 차별을 문장으로 옮겨 세계인이 읽는 언어로 만들었다. 이들은 특별한 재능을 타고나서가 아니라, 자신이 서 있던 자리를 있는 그대로 쓰는 것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그 쓰기가 결국 그들의 삶을 증언하고, 나아가 삶을 바꾸었다. 『표준어 바깥에서』가 지금 다시 던지는 질문은 하나다. 당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당신도 쓸 수 있는가.
『표준어 바깥에서』 이렇게 읽자 이 책은 시대순으로 배열된 4부, 17편의 작가론으로 구성된다. <1부 노예와 여성의 첫 목소리>에서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노예 출신 작가 이솝과 테렌티우스, 그리고 여성 최초로 욕망을 노래한 시인 사포를 다룬다. 문자 권력이라는 범주에 도전장을 내민 최초의 작가들인 셈이다. 이들이 정확히 무엇 때문에 고통받았는지, 노예라는 신분, 여성이라는 성별 그 자체가 어떻게 저자성을 의심하고 부정하는 근거가 되었는지를 눈여겨보면 좋다. <2부 근대 문학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에서는 세르반테스, 안데르센, 디킨스, 트웨인 등 흔히 ‘모험소설가’, ‘동화작가’로만 소개되었으나 실은 당대 가장 진보적이었던 작가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들이 왜 그런 온화한 이름 뒤에 가려졌는지, 그 이미지가 정작 무엇을 지워버렸는지를 되짚어 읽는 재미가 있다. <3부 일하는 몸, 말하는 주체가 되다>는 노동과 계급의 언어로 20세기 문학을 다시 쓴 이들을 소개한다. 네루다, 사라마구, 귄터 발라프, 제라르 모디랫, 어빈 웰시가 바로 그들인데, 이 가운데는 발라프나 모디랫처럼 대중에게 생소한 작가도 있다. 관전 포인트는 이들이 노동을 소재가 아니라 몸으로 통과했다는 데 있다. 발라프는 직접 이주노동자로 위장해 잠입했고, 사라마구는 쉰여덟까지 정비공으로 일하며 자신의 문장을 벼렸다. <4부 겹겹의 억압을 넘어서>는 이 책의 핵심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으로, 계급과 젠더, 인종과 식민의 억압이 겹친 자리에서 태어난 문학의 세계를 보여준다. 마이아 에켈뢰브, 라오서, 강경애, 마야 안젤루, 제임스 볼드윈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억압이 한 사람의 몸 위에 두 겹, 세 겹으로 쌓일 때 무엇을 빼앗기는지, 어떻게 해서 그것을 다시 찾아가는지 따라가며 읽어보자. “글은 여전히 ‘먹고살 만한 사람’이 쓰는 것이라는 생각이 너무도 강하다. 그러나 이 책이 끝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지독하게 가난하게 태어나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도 쓸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라는 저자의 한마디가 이 책에 실린 17인의 삶과 문학을 대변한다.

테렌티우스는 카르타고에서 태어나 로마 원로원 의원 테렌티우스 루카누스의 노예로 팔려 왔다. 주인은 그에게 교육을 시켰고, 재능을 알아본 뒤 해방시켰다. 여기까지는 노예 출신 지식인의 흔한 이력이다. 문제는 그다음부터다. 테렌티우스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1세(Publius Cornelius Scipio Africanus, 기원전 235년~183년), 가이우스 라엘리우스(Gaius Laelius, 기원전 234년경~160년) 같은 로마 최고 귀족들과 어울리며 스키피오 학파의 일원이 되고, 그리스 문화의 세례를 받아 세련된 라틴어 희곡을 쓰기 시작하자 로마 사회는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노예 출신이 그런 문장을 쓸 리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온 소문은 실은 그 귀족 후원자들이 대신 써주고 테렌티우스는 얼굴마담 노릇을 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테렌티우스는 이 소문을 굳이 강하게 반박하지 않았는데, 그 침묵이 오히려 소문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 비난이야말로 노예 출신 작가가 마주하는 전형적인 벽이다. 실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실력의 소유권 자체를 의심하는 것이다. 이솝의 이야기가 구전으로 남아 저자성을 증명할 길이 없었다면, 테렌티우스는 반대로 너무 뛰어났기 때문에 저자성을 의심받았다. 노예 출신 작가는 무능해도 의심받고 유능해도 의심받는다._<푸블리우스 테렌티우스> 중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가장 정확하게 트웨인을 평가한 사람일 것이다. 그는 “모든 미국의 현대문학은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으로부터 나왔다. 그전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그 후로도 없었다”고 말했다. (...)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트웨인이 당대의 미국을 철저히 비판한 반체제적인 인물로서, 그의 비판이 지금도 그대로 적용될 만한 가치를 갖는다는 점이다. 즉 그는 인종차별과 제국주의, 기독교 근본주의를 강력하게 비판했고, 열렬한 노예폐지론자(Abolitionist)였으며, 여성참정권을 주장했고, 소수인종에게 동정적이었다. 이런 점들은 지금 미국에서도 여전히 문제이니 트웨인의 비판은 여전히 살아있다. 물론 남부연맹군, 정확히는 친노예제 민병대에 자진 입대해서 2주간 복무했다 탈영하는 과오도 범했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시행착오의 작은 과오에 불과한 것이었으니 문제 삼을 필요도 없다. (...) 그러나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가 노동자 출신의 위대한 노동소설가라는 점이다. 특히 『아서 왕 궁전의 코네티컷 양키A Connecticut Yankee in King Arthur’s Court』(이하 『코네티컷 양키』로 줄임)는 소위 ‘황금시대’의 노동자 착취를 비판하면서, 소수(자본가 등)를 독점적 관행과 정부 보조금 로비를 일삼는 억압자로, 다수(노동자 등)를 억압받는 사람으로 규정했다. 이런 반체제성이나 그가 노동소설가라는 점은 미국 이상으로 한국에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아 문제다._<마크 트웨인>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