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피재현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불투명 인간』이 걷는사람 시인선 152번으로 출간되었다. 『우는 시간』, 『원더우먼 윤채선』에 이어 이번 시집에서는 노인과 이주 노동자, 역사의 희생자들, 먼저 떠난 사람들까지 애도의 반경을 넓힌다. 완전히 투명하지도, 완전히 가려지지도 않는 존재들인 ‘불투명 인간’들의 목소리를 시 안에 담아냈다.
농촌 마을의 홀로 남겨진 노인들, 안동과 의성 들판의 이주 노동자들, 경산 코발트 광산 학살 사건의 희생자들까지 시인은 고발이나 연민에 머무르지 않고 삶의 흔적과 목소리를 기록한다. 방언과 구어를 살린 시편들은 공식 언어가 지워버린 존재들의 말을 다시 불러낸다. 문학평론가 노지영은 이 시집을 “혼맹의 시대에 맞서는 시의 마음”이라고 평했다.
출판사 리뷰
걷는사람 시인선 152
피재현 시집 『불투명 인간』 출간
“떠내려온 것들끼리 손 맞잡고
견디는 꽃”처럼
다 늙은 고아원 마을에서, 이국의 들판에서, 갱도 아래에서
불투명한 존재들이 함께 피워 내는 목소리
피재현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불투명 인간』이 걷는사람 시인선 152번으로 출간되었다. 첫 시집 『우는 시간』에서 사라진 것들의 기억을 붙들었던 시인은 두 번째 시집 『원더우먼 윤채선』에서 어머니의 삶을 진혼곡으로 새겼다. “무적의 원더우먼”이자 삶의 가장 밑바닥에서 평생을 노동한 어머니─그 한 사람의 이야기가 동시대 모든 ‘윤채선들’의 이야기로 번져 나가는 시집이었다. 세 번째 시집 『불투명 인간』은 그 애도의 반경을 더 넓고 깊게 확장한다. 시인은 투명 인간 취급을 받아 온 노인들, 이주 노동자들, 역사의 희생자들, 먼저 떠난 사람들을 시 안으로 불러들인다. 완전히 투명하지도, 완전히 가려지지도 않는 존재—'불투명 인간'들의 목소리가 이 시집을 가득 채운다.
1부는 ‘다 늙은 아이들이 모여 사는 커다란 고아원’ 같은 농촌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홀로 텔레비전을 보던 의자를 고쳐 달라고 공방을 찾아온 할머니(「할매 옥수수」), 설날 밤 자식과 다투고 지척의 이웃집에서 아침까지 잠든 만수 할배(「만수 할배 실종 사건」), 혼자 죽어 봉투에 장례비를 남겨 둔 김 영감(「삼일장」). 쇠락의 풍경 속에서도 절뚝거리는 몸으로 옥수수를 삶아 이고 오는 할매처럼,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상호 부조의 감각이 잇따라 흐른다.
3부에는 안동과 의성 들판의 이주 노동자들이 등장한다. 베트남에서 온 프엉이 들깨 한 마지기를 혼자 다 치는 동안 파리 올림픽 중계는 계속되고(「파리 올림픽」), 봄눈을 처음 본 인도네시아 청년 둘이 동시에 엄마를 부르며 눈물을 흘린다(「봄인가 하면 한 번씩 눈이 내렸다」). 시인은 이 존재들을 고발이나 연민 없이 기록하며 이렇게 쓴다. “서로 다른 색깔끼리/서로 다른 크기끼리/엎치고 덮쳐 피워 내는/우리는 지금 비꽃”(「비꽃」).
그럴 줄 알았으면 산에서 그냥 죽을 걸 그랬어요
아버지가 죽고 아재가 죽고 아무개가 죽고
개돼지처럼 사람이 죽고 사람처럼 개돼지가 죽고
기어이 죽일 거였으면 결국은 죽을 거였으면
그 푸른 바다는 건너지 말 걸 그랬어요
그 높푸른 하늘을 우러르지 말 걸 그랬어요
코발트 레드
빛나는 피바다를 건너 나는 이제 집에 갈래요
어멍 아방 묻혀 있는 섬으로 갈래요
―「코발트 레드」 부분
이 시집의 가장 무거운 목소리는 경산 코발트 광산 학살 사건 연작에 있다. “도대체 지금 나는 왜 죽고 있는가”라고 묻는 목소리, 집에 가고 싶다고 서성거리는 목소리, “어여 어여 나오그라 집에 가자” 하고 부르는 목소리. 시인은 방언과 구어를 끌어들여 공식 언어가 지워 버린 희생자들의 말을 되살린다.
문학평론가 노지영은 해설에서 피재현의 시를 ‘혼맹(魂盲)’의 시대에 맞서는 ‘시의 마음’으로 읽는다. 타인의 혼을 인식하지 못한 채 경쟁과 효용만을 추구하는 산업 자본주의 시대에, 피재현의 시는 지워져 가는 존재들과 온전히 교류하며 공동체의 근원적 감수성을 복원하려 한다.
밤새 내린 눈으로 사람을 만들었다
눈과 사람 사이에 오간 찰나의 생명
잠깐 살다 가는 것은
사람이나 눈사람이나 마찬가지
눈 코 입 달아 놓고
그새 휜 등을 쓸어 본다
밤새 녹아 없어진 사람들이 많았다
―「눈사람」 부분
노인들만 사는
우리 마을은
커다란 고아원
엄마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밥 먹으라고 부르는
엄마가 없어
밥때도 놓치고
숙제하라고 다그치는
엄마가 없어
마당 가득 풀밭이다
우리 마을은
다 늙은 아이들이 모여 사는
커다란 고아원
―「우리 마을」 부분
먼저 죽은 사람들은
어디 멀리로 간 것이 아니라
곳곳에 숨어서 살고 있다
내가 듣기로 사람이 죽으면
몸은 그림자도 없이 투명해지고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
생전에 궁금했던 어떤 시점에 가 보기도 하고
지근거리에서 누군가를 오래 지켜보기도 하면서
지낸다고 한다
어제,
몸살이 나서 창가에 이불을 깔고 누웠다가
역광으로 비치는 아버지의 실루엣을 보았다
투명 인간이 되었지만 여전한 불투명 인간이어서
왼손을 허리춤에 얹고 걷는 모습이
영락없이 아버지였다
허리 병을 고쳐서 보내 드렸어야 했는데
갑자기 가 버리셔서 그러지 못했다
―「숨어 사는 사람들」 전문
작가 소개
지은이 : 피재현
1967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1999년 계간 《사람의 문학》 신인 추천으로 등단하였으며 시집 『우는 시간』 『원더우먼 윤채선』을 냈다.
목차
1부 다 늙은 아이들이 모여 사는
눈사람
할매 옥수수
집이 슬프다
수제비 먹으러 갈래요
택배차
애호박
세신사 형
말도 못 하게 시끄러워서
새 식구
삼일장
만수 할배
만수 할배 실종 사건
우리 마을
눈을 감고 있는 동안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개복숭아꽃이 피었습니다
2부 어린 여름처럼
권정생 17주기
딸 자랑
속물과 군자 사이
아버지를 씻기던 때가 있었다
숨어 사는 사람들
청산도 꽃구경
밥 한 그릇
직산
봄 사과
농
태백
절
문패
아무도 몰래 변두리 노래방 계단을 올라간 적이 있다
3부 소는 보이지 않고
대치
비꽃
파리 올림픽
양파 캐기
봄인가 하면 한 번씩 눈이 내렸다
베트남이라는 말
숭고한 일
개껌
어떤 봄
기아라는 말
코발트 광산에서의 학살
코발트 광산에 비가 내린다
코발트 광산에 백일홍이 피었다
코발트 레드
생몰
슬픈 일
4부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나무가 없으면
여우꼬리 맨드라미
가을 국화
불길
금방이라는 말
배롱나무 식재에 관한 리포트
손을 사랑하는 일
퇴근길
유비무환
홰
씨감자에게
싹 다 고칩니다 전파사
뉘우치는 시간
노래
해설
혼과 교유하는 시의 마음
- 노지영(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