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잡지 《유령들》은 유령이 뒤집어쓴 흰 자루처럼
외양 없는 문학의 몸피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비정기 문학 잡지 《유령들》이 4호로 돌아왔다. 그동안 소설가 김화진이 혼자 만들어온 이 잡지는 이번 호부터 출판사 스위밍꿀과 함께한다.
《유령들》의 표지에는 필자 이름도, 작품 제목도 적혀 있지 않다. 표지가 작품을 미리 설명하거나 익숙한 이름으로 독자를 이끌기보다, 독자가 책을 펼친 뒤 비로소 각각의 글과 만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비어 있는 듯 보이지만, 그 안에 있는 존재로 인해 흰 천 위에 얼굴과 몸의 윤곽이 생겨나는 유령처럼, 이 잡지는 그 안에 담긴 문학이 저마다의 형체와 표정을 드러낼 수 있는 몸이 되고자 한다.
김화진은 4호의 필자 후기에서 《유령들》을 혼자 내기로 마음먹었을 때 세운 원칙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유령들》이라는 문학 잡지를 혼자서 내자고 마음먹었을 때 나는 내 마음에 내키지 않는 것은 이 잡지에 아무것도 담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가 말하는 ‘마음에 내키지 않는 것’에는 남들이 읽기에 좋으려면 이런 글은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넣고 싶은 글을 빼거나, 빼고 싶은 글을 넣는 일이 포함된다. 무엇보다 그는 “표지든 내용이든 일정이든 내가 욕심난다는 이유로 잡지에 함께 담기는 사람들에게 스트레스 주지 말기”를 원칙으로 삼았다. 그렇게 《유령들》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할 수 있는 것만 한” 잡지가 되었다.
이 원칙은 4호를 만드는 과정에서도 이어졌다. 정해진 형식과 속도에 사람을 맞추기보다 각자가 쓰고 싶은 글을 자신의 시간 안에서 완성할 수 있도록 기다렸다. 편집 역시 글에 힘을 더하거나 하나의 방향으로 몰아가기보다, 저마다 다른 모양과 리듬을 지닌 원고가 자연스럽게 모습을 드러내도록 이루어졌다. 편집에 참여한 황예인은 필자 후기에서 “저마다의 시간을 통과해 도착한 원고를 받을 때 유독 기뻤다”며, 그것이 자신에게 보내온 편지 같아 “답장하듯 교정을 보았다”고 적었다.
《유령들》은 발행일을 정해두고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잡지가 아니다. 김화진의 표현처럼 3호 이후 “이런저런 이유로 할 수 없어진 탓에 할 수 없게 된 잡지”였고, “몸 없고 힘없는 유령은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보이다가” 스위밍꿀과 함께 다시 한번 뒤집어쓸 흰 천을 얻었다. 언제 다시 나타날지 미리 약속할 수 없다는 점마저 이 잡지의 모습과 닮아 있다. 사람과 글이 자연스럽게 모이고, 다시 만들 마음과 힘이 생겼을 때 불쑥 모습을 드러내는 비정기 문학 잡지. 그 자유롭고 편안한 리듬이 독자에게도 전해지기를 바란다.
흰 자루에 담긴 문학이라는 유령들의
얼굴뼈와 등뼈, 표정과 몸짓을 더듬더듬 만져보세요.
4호에는 소설 3편, 시 4편, 평론 2편, 에세이 2편이 담겨 있으며, 최미래, 김화진, 권혜영, 최지은, 김예솔비, 김병규, 김미래, 황예인이 참여했다.
소설
최미래의 「노란 피는 천천히 돈다」는 뜨거운 마음이 식어버린 사람이 다시 자신의 온기를 감각해가는 이야기다. 혈장을 팔며 살아가는 사십대 여성 보은은 사람과 관계, 자기 삶에 무덤덤해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에게 끈질기게 다가오는 사람들, 서로의 삶을 돌보고 지탱하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며 차갑게 식어 있던 몸과 마음에 다시 피가 돌기 시작한다. 담담하고 씁쓸한 문장 속에서, 인간을 지겨워하면서도 결국 인간의 온기를 향해 돌아가는 마음을 그린다.
김화진의 「편 고르기」는 내가 고른 사람이 나를 고르지 않을 때 생겨나는 마음의 움직임을 선명하게 포착한다. 편집자 완희는 수업에서 만난 수이를 좋아하게 되고 그에게 선택받고 싶다는 마음을 품는다. 좋아한다는 감정에는 상대를 고르는 일뿐 아니라, 상대가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기다리는 일도 함께 들어 있다. 고르고, 쓰고, 기다리고, 끝내 놓치는 동안 한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따라가는 소설이다.
권혜영의 「도깨비 갱생일지」는 잘 살기 위해 애쓰는 동안 소진되어버린 마음을 되살리는 이야기다. 만사에 지쳐버린 한 사람 앞에 엉망진창 도깨비 일가족이 나타난다. 평온과 질서를 깨뜨리는 그들의 소란은 뜻밖에도 다시 살아갈 기운을 불러온다. 표지 뒷면에도 실린 다음 문장은 이 소설의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도깨비는 흥이 많다.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만들고 분위기를 휩쓸어버리는 데 능하다. 그리고 죽도록 지친 사람까지도 함께 춤추게 만든다.”
시
최지은의 시 4편 「오브제」 「눈 오는 밤」 「봄」 「사월의 마음」은 상실과 고독, 계절을 지나며 달라지는 마음의 감각을 다룬다. 떠난 사람이 만지고 간 자리에 털이 자라나는 이미지로 시작하는 「오브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슬픔에도 구체적인 모양과 촉감이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눈과 봄, 사월이라는 계절의 표정을 통과하며 사라진 것과 남아 있는 것, 두려워하면서도 다시 나아가려는 마음을 천천히 살핀다.
평론
김예솔비의 「나에게서 나에게로」는 ‘나’라는 좁고 답답한 세계에 갇힌 우리를 자유롭게 해줄 또 다른 나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쓰시마 유코의 소설집 『나』와 로버트 알트먼의 영화 〈세 여인〉을 경유하며, 자아를 단단하고 하나뿐인 실체로 바라보는 대신 여러 가능성 위에 잠시 붙잡힌 표면으로 읽는다. ‘나’가 반드시 하나일 필요는 없으며, 지금의 나를 비껴간 삶들 역시 내 안에 머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글이다.
김병규의 「자기 얼굴을 본다는 것: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와 사진에 담긴 얼굴」은 폴 토마스 앤더슨의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통해 자기 얼굴을 바라보고 기록한다는 것의 의미를 묻는다. 서로의 얼굴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채 장소 없이 떠도는 인물들의 세계에서 스마트폰 카메라는 자신을 비춰볼 수 있는 동시대의 도구로 등장한다. 영화가 마침내 하나의 얼굴과 마주하는 순간을 따라가며, 자기 자신을 본다는 오래되고도 낯선 행위를 사유한다.
에세이
김미래의 「귀환지는 실외여도 실내만큼 아늑하다」는 폐 절제술 이후의 회복기를 기록한 에세이다. 자기 몸 안에 생긴 변화를 뒤늦게 알아차리고, 수술과 회복을 지나며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몸의 속도와 감각을 배워간다. 모든 것을 이해하거나 스스로 해결하려 하기보다 모르는 채 누워 있는 법과 다른 사람에게 몸을 맡기는 법을 익힌다. 회복이란, 이전과 똑같은 상태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라 새로운 몸의 리듬을 체득해가는 일임을 보여준다.
황예인의 「마감은 올해 안이면 돼요」는 깨진 컵에 얽힌 에피소드와, 어린 시절 피아노 학원에서 만난 여자아이가 휴거를 기다리다 사라진 기억을 통해 상실을 에둘러 말한다. 이후 킨츠기, 곧 깨진 그릇을 이어 붙여 수선하는 사람에게 화병을 맡기고 기다리는 시간을 따라가며, 영영 사라질 뻔한 것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황홀한 설렘을 그린다.
작은 잡지 안에는 여러 유령의 목소리가 와글와글할 것입니다.
가장 잘 들리는 소리에 귀 기울여보세요.
《유령들》 4호의 글들은 하나의 주제나 목소리 아래 단단히 묶여 있지 않다. 서로 다른 시간과 형식, 온도를 지닌 글들이 한 권 안에서 느슨하게 이웃한다. 어떤 글은 곧바로 말을 걸고, 어떤 글은 한참 뒤에야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저마다의 속도로 도착한 글들이니, 읽는 사람도 서두르지 않고 마음이 가는 목소리부터 만나면 된다.
문학 잡지가 낯선 독자라면, 끌리는 제목 하나를 골라 펼쳐보길 권한다. 한 명의 필자가 쓴 단행본과 달리, 문학 잡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읽지 않아도 좋다. 시부터 읽어도, 에세이부터 시작해도 된다. 자신만의 순서로 이 책 안을 걸어보기를 바란다.
이미 문학 잡지를 즐겨 읽어왔다면, 이번 호에서 마음에 드는 이름에 동그라미를 쳐보길 권한다. 익숙한 작가의 글에서 시작해 새로운 이름으로 건너가며, 읽기의 가지를 계속 뻗어가는 즐거움이 있을 것이다.
《유령들》은 다음 호가 언제 나타날지 약속하지 않는다. 한동안 모습을 감추었다가도, 함께 싣고 싶은 글과 사람이 모이고 다시 만들 힘이 생기면 유령처럼 불쑥 돌아올 것이다. 그러니 지금 나타난 《유령들》을 마음껏 즐겨주시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올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려주시기를 바란다.

내 영혼도 원심분리기에 넣고 돌려버리고 싶어. 이런저런 면모로 뒤엉켜 있는 내가 이해하기 쉽게 딱딱 나누어진다면. 예컨대, 사람을 좋아하는 내가 있고 싫어하는 내가 있다. 당차게 살겠다고 결심한 내가 있고, 누가 휘두르든 말든 상관없는 내가 있다.(최미래, 「노란 피는 천천히 돈다」)
수이 씨, 저는 수이 씨 편이에요. 골라야 한다면 저를 골라주세요, 발신해보았다. 사각형의 방 허공 어딘가를 바라보며, 마음을 보내면 그쪽에서 답장이 올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중얼거리는 나.(김화진, 「편 고르기」)
작가 소개
지은이 : 최미래
2019년 『실천문학』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녹색 갈증』 『모양새』 『돼지 목에 사랑』이 있다. 이상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지은이 : 김화진
202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나주에 대하여」가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나주에 대하여』, 연작소설 『공룡의 이동 경로』, 장편소설 『동경』 등이 있다. 2023년 제47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다.ⓒ신동민
지은이 : 김미래
외국 친구를 만나면 future라고 소개한다. 그러면 그 친구는 동명의 래퍼를 떠올리고는, 나와 그의 외양적 불일치에 개구진 웃음을 짓는다. 때로 여유가 될 때면, 그는 작은 체구의 동양인으로부터 맘바 멘털리티 같은 것을 상상해보기도 한다. 이번에는, 그가 찾은 영혼적 일치! 그리하여 이 동양인은 자길 크게 봐주는 사람 앞에서 원래보다 한 뼘 커진다. 그치만 애초에, 그는 작지 않았던 게 아닐까. 그전에 쓴 책으로 『그건, 고래』(2024)와 『편집의 말들』(2023)이 있다.
지은이 : 최지은
2017년 창비신인시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봄밤이 끝나가요, 때마침 시는 너무 짧고요』를 썼다.
지은이 : 김병규
영화평론가. 중앙대학교 영화학과를 졸업했고 대학에 다니는 동안 두 편의 단편영화를 연출했다.2018년 영화잡지 《필로》 신인 영화평론가에 선정되고 같은 해 《씨네21》 영화평론상을 수상하며 평론가로 영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졸업한 예술고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영화에 대해 가르친다. 영화를 보러 다니고 이따금 영화를 만드는 현장에 간다. 영화평론가로 활동한 지 7년이 되는 해에 첫 평론집 『빈손의 영화』를 선보인다.
지은이 : 권혜영
2020년 《실천문학》 신인상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사랑 파먹기》가 있다.
지은이 : 김예솔비
영화평론가.
지은이 : 황예인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