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행운반점 12·3
제주 시내 중국인 관광객으로 붐비는 거리를 벗어나 한라산 방향으로 10분쯤 걸어가면 중국인들이 모여 사는 동네가 나온다. 둔중한 문자가 새겨진 간판 아래로 생경한 말소리가 흘러나오고, 알싸한 향신료 냄새가 콧속으로 파고드는 곳. 잠시 낯선 나라의 변두리로 순간 이동한 듯한 착각이 든다. 어색함을 견디며 걷다 보면 후미진 골목이 보이는데, 그 구석에 4층짜리 건물의 입구가 숨어 있다. 3층에 주연 다방을 품은 낡고 오래된 건물. 엘리베이터가 없어 3층까지 걸어 올라가야 한다.
내가 주연 다방을 좋아하는 까닭은 장소가 한적하여 왕래하는 사람이 드물고, 팔 길이보다 긴 수족관이 있기 때문이다. 햇빛이 잘 들지 않아 어둑하고 서늘한 그곳이 달나라처럼 밝고 따뜻하게 느껴지는 데에는 수족관의 영향이 크다. 수족관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물고기들을 관찰하면 지긋지긋한 불안과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개중 내가 특히 좋아하는 녀석은 입술을 내밀고 유영하는 은빛 물고기, 키싱구라미다. 커다란 입술로 다른 키싱구라미와 키스하는 열대어. 한 마리가 죽으면 남은 한 마리도 따라 죽는다고 영화 쉬리에서 여주인공은 말했다. 먹지 못해 말라 죽기도 하고, 비늘이 벗겨지고 배에 물이 차 죽기도 한다고…. 하얀 수초 사이를 오가는 키싱구라미 앞에서 배우 한석규와 김윤진이 뜨거운 키스를 나누는 모습은 생각만으로도 가슴 뛰게 하는 명장면이다.
영화 속 한석규에게 김윤진이 있다면 나에겐 한은혜가 있다. 그녀는 언제나 내 옆에 앉아 커피에 프림과 설탕 두 스푼을 넣어준다. 가끔 피자와 함께 맥주를 내주기도 한다. 나는 어릴 적부터 사람들이 나를 껴안으면 질색했다. 그 대상이 부모님이라도 품 안에 갇히게 되면 숨이 막혀 꽥, 소리를 질렀다. 다른 사람의 몸이 내 몸을 스치면 피부 전체에 닭살이 돋는다. 누군가 옆에 앉아 나를 쳐다보고, 말을 건네고, 체취를 풍기면 온몸이 쪼그라든다. 그런데 은혜 씨가 안아줄 땐 달랐다. 아무리 세게 끌어안아도 답답하지 않았고, 오히려 술에 취한 듯 기분이 알딸딸해졌다. 따뜻한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면 그늘진 마음에 볕이 들었고, 상큼한 비누 향기를 맡으면 녹슨 뇌수에 윤기가 돌았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윤호준
2013년 제주도에 정착하여 동네 의원에서 진료하며 틈틈이 집필. 2024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로 등단.소설집『행운반점 12・3』
목차
행운반점 12·3 / 008
전복 캐는 소녀 / 036
짝눈 / 060
황무지 위에 악의 꽃 / 090
제주에 온 사람들 / 116
테니스 잘 치는 방법 / 144
퍼포먼서 / 170
집게손가락 / 196
김밥 잘 마는 방법 / 226
해설
경계를 넘나드는, 손의 윤리학 / 252
—김나정(소설가・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