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구석구석 찾아낸 서울의 숨은 역사 이야기' 시리즈의 3권. 압구정, 살곶이다리, 사육신, 선농단과 설렁탕, 탄천 등 그 동안 우리가 잘 모르고 있던, 서울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역사 이야기를 소개하는 책. 마치 엄마, 아빠가 머리맡에서 이야기해 주듯 재미있고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또한, 꼭지 말미에 마련된 역사 확대경 코너를 통해서, 그 꼭지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역사 상식을 다양하게 만나볼 수 있다. 행주대첩, 왕자의 난, 병자호란, 4군6진 개척, 사육신과 생육신 등 본문에 실린 이야기의 뒷배경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상식들도 실려 있다.
특히, 100여 컷에 이르는 방대한 사진 자료를 통해 추상적인 내용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인물, 서책, 역사 현장, 사당, 나루, 하천 등 관련 사진과 함께 읽으며 그 시대, 그 장소에서 특정 인물을 만나고 온 듯한 현장감을 느낄 수 있다.
출판사 리뷰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혜안을 기르는 방법
우리가 역사를 배우고 선조들이 남긴 문화유산을 보호하고 가꿔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은 역사가 지나간 과거이기는 하지만, 사람이 만들어가는 역사는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이기에 과거의 역사를 통해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혜안을 기를 수 있기 때문에 역사를 배우는 것이다.
또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우리가 만들어낸 역사와 더불어 우리의 선조들이 남긴 훌륭한 문화유산을 우리의 후손들에게 잘 전달해 줄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은 경제적 가치가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선진국일수록 문화유산을 보호하고 아끼는 것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아니, 오히려 문화유산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라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책이 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 우리의 문화유산을 보호하고 가꾸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조금이라도 답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책의 특장점
엄마, 아빠가 들려 주듯 쉽고 재미있게 엮은 역사 이야기
압구정, 살곶이다리, 사육신, 선농단과 설렁탕, 탄천 등 그 동안 우리가 잘 모르고 있던, 서울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역사 이야기가 마치 엄마, 아빠가 머리맡에서 이야기해 주듯 재미있고 흥미진진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여행을 다녀온 듯한 짜릿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알쏭달쏭 역사 확대경' 코너를 통해 역사 상식을 넓힐 수 있는 책
꼭지 말미에 마련된 역사 확대경 코너를 통해서, 그 꼭지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역사 상식을 다양하게 만나볼 수 있습니다. 행주대첩, 왕자의 난, 병자호란, 4군6진 개척, 사육신과 생육신 등 본문에 실린 이야기의 뒷배경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상식들이 실려 있습니다.
100여 컷에 이르는 사진 자료를 통해 학습 효과를 배가시킨 책
‘백문이불여일견’이라는 말도 있듯이, 100여 컷에 이르는 방대한 사진 자료를 통해 추상적인 내용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인물, 서책, 역사 현장, 사당, 나루, 하천 등 관련 사진과 함께 읽노라면 마치 그 시대, 그 장소에서 특정 인물을 만나고 온 듯한 생생한 현장감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내용 개요
역사상 많은 위인을 배출한 마른냇골
허균, 유성룡, 이순신 등 이 지역에서 태어났거나 살았던 역사상 위인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오늘날의 충무로 부근인 마른내에서 태어나고 산다고 해서 저절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닐 터! ‘나도 이 분들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지!’ 하고 결심을 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압구정동의 유래가 된 정자, 압구정
수양대군을 임금으로 추대하는 데 일등공신이었던 한명회. 딸들을 왕비로 앉히고 온갖 권력과 부귀영화를 다 누리고 말년에 호화로운 압구정을 지어 갈매기도 기피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씻는다고 숯이 하얘지랴
‘삼천갑자 동방삭’을 잡기 위해 탄천에서 숯을 씻었다는 저승사자 이야기. 탄천의 유래와 저승 세계의 일면을 살짝 들여다볼 수 있다.
송파구 오금동의 지명에 얽힌 이야기
병자호란 당시 인조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몽진하던 중, 백토고개에서 오금이 저린다며 주저앉았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 오금동.
반말하지 마시오!
고려 말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소개한 안향 집안 노비들의 이야기. 대성인을 모신다는 자부심이 강하여 양반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설렁탕을 최초로 개발한 사람도 바로 이들이라고 한다.
나라를 위한 바른 소리 집단, 권당
조선시대의 성균관 유생들이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으라며 시위하던 권당. 옛날이나 지금이나 언로가 막히면 사회가 썩기 쉽다. 언론은 가장 강력한 집권 세력에 대한 견제 장치이기 때문이다.
사육신, 생육신 이야기
어린 조카 단종 임금을 내쫓고 왕위에 오르기 위한 수양대군의 처절한 몸부림. 뛰어난 인재들인 사육신을 내 사람으로 만들고자 애쓰지만, 명분 없는 실리 추구가 얼마나 모래 위 누각처럼 위태한 것인지 역사는 증명해 보이고 있다.
왕자의 난
태조 이성계의 아들들이 왕위를 놓고 벌인, 피비린내나는 아귀다툼. 엄격한 신분사회냐 아니냐만 다를 뿐 오늘날 정치판의 싸움박질과도 별반 다름이 없어 보인다.
'알쏭달쏭 역사 확대경'에서 다룬 역사 상식들
권율 장군과 행주대첩 권율 장군은 명나라 군대와 합세하여 서울을 수복하기 위해 북상하다가 독산성(독왕산성)에서 일본군을 무찌르고 행주산성으로 진을 옮겼습니다. 이 무렵 왜군은 평양성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총퇴각하여 서울에 집결한 뒤 대규모의 병력을 정비하고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왜군은 3만여 명의 대군으로 행주산성을 총공격했습니다. 성 안의 관군과 승군(승려들로 이루어진 군대)은 화살, 총통 등을 쏘아대며 용감히 맞섰습니다. 화살이 다 떨어지자 돌을 던지며 싸웠고, 부녀자들도 치마를 이용하여 돌을 날라 병사들에게 공급해 주었습니다. 이 때 마침 경기수사 이빈이 한강을 거슬러올라와 일본군의 후방을 칠 기세를 보이자 이미 큰 피해를 입은 왜군은 도망가기 시작하였습니다.
행주대첩은 진주대첩, 한산도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로 꼽힙니다. 권율은 이 공로로 도원수로 임명되었고, 왜군은 다시는 서울 이북으로 출병하지 않고 퇴각을 서둘렀습니다.
의병장 조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 1,600여 명을 모아 영규대사의 승군과 함께 청주성을 수복하였습니다. 이어 금산으로 나아가 700명의 병사와 함께 전라도로 진격하려던 왜군을 맞아 전투 끝에 모두 전사하였습니다.
이후 조헌 선생의 제자인 박정량과 전승업이 시체를 거두어 무덤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칠백의총입니다.
사명대사(1544~1610) 금강산에서 수도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을 일으켜 평양성 전투에 참가하는 등 여러 전투에서 큰 전공을 세웠습니다. 그 후 전후 네 차례에 걸쳐 적진에 들어가서 회담을 가졌습니다. 일본이 제시한 강화 5조약의 모순을 하나하나 논리적으로 지적하여 그들의 죄상을 낱낱이 밝혔습니다.
또한 일본으로 가서 전란 때 잡혀간 3천여 명의 조선 백성들을 데리고 귀국하였습니다. 병을 얻어 해인사에서 요양하다가 1610년, 결가부좌한 채 입적하였습니다.
명부전의 시왕(열 십, 임금 왕 한자넣기)과 저승사자들 절에 가면 명부전이 있는데, 이것은 저승세계를 절에 옮겨놓은 전각입니다.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영원히 부처 되기를 포기한 지장보살을 주존불로 하고 좌우로 저승 지옥계의 심판인 시왕과 저승사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옥 하면 떠올리는 염라대왕도 시왕 중 한 명입니다.
우리가 흔히 저승사자라고 부르는 사자는 사람이 죽었을 때 염라대왕을 비롯한 지옥의 왕들이 파견하는 사자입니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태어난 해, 월, 일, 시를 각각 다스리는 네 명의 사자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절에 가면 거의 명부전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는 후손들이 돌아가신 분이 좋은 곳으로 가기를 기원하면서 지내는 49재 등의 불교 의식이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심과 일치된 결과로 보입니다.
정묘호란 광해군 때는 현명한 외교 정책으로 후금과의 전쟁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조반정 후 후금을 오랑캐라 여기고 배척하는 정책을 펴자 관계가 악화되었습니다.
이 때 마침 이괄의 잔당이 후금과 내통하여 조선을 칠 것을 주장하자 마침내 후금의 태종은 광해군을 위해 보복한다는 등의 구실로 1627년 1월, 아민 등에게 3만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케 하였습니다.
후금의 주력 부대가 의주를 거쳐 평양, 황주에 이르자 인조는 강화도로, 소현세자는 전주로 피난했고 정봉수, 이립 등 의병이 각지에서 일어나 활약하였습니다. 그런데 평산까지 남하한 후금은 후방을 공격당할 우려가 있어 강화 의사를 표시하였고, 마침내 3월 3일 화의가 성립되어 양국은 형제국이 되었습니다.
병자호란 후금은 군사를 철수시킨다는 약속을 어기고 의주에 군사를 계속 주둔시켰고, 각종 경제적 이득을 취했으며, 기존의 형제의 맹약을 군신 관계로 고칠 것을 요구하는 등 계속하여 조선을 압박하였습니다.
조선이 이를 거부하자, 국호를 청으로 고친 태종은 1636년 12월 직접 조선 침략을 감행했습니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청군에 맞섰습니다. 이 때 성 안에는 약 50일분의 양식이 있었습니다.
청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하자 혹한과 싸워야 했으며 점차 식량마저 떨어져 갔습니다. 청 태종은 이듬해 1월 1일에 남한산성 아래의 탄천에 12만여 명의 군사를 결집시켜 놓았습니다. 22일에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이렇듯 모든 정세가 불리해지자 인조는 30일, 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의 의식을 행했습니다.
1644년 청은 수도를 선양에서 베이징으로 옮기고, 이듬해에는 선양에 잡혀갔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등을 조선으로 돌려보냄으로써 병자호란 관계는 마무리되었습니다.
주자학을 들여온 안향(1243~1306) 고려 때의 문신이자 학자로, 어릴 적 이름은 안유입니다. 고려 원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섰습니다. 1270년 삼별초의 난 때 강화까지 잡혀갔다가 겨우 탈출하였습니다.
그 후에 원나라에 들어가서 공자가 세운 유학의 한 줄기인 주자학을 연구하고 돌아왔습니다. 주자서를 손수 베끼고 주자의 초상화를 그려오기도 하였습니다.
당시의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받들고 있었지만, 승려들의 부패로 백성들은 다른 종교를 찾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안향이 들여온 주자학은 삽시간에 나라 안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안향이 들여와서 우리나라에 최초로 소개된 주자학은 고려를 멸하고 조선을 세우는 정신적인 토대가 되었습니다.
기묘사화 중종 14년(1519)에 남곤, 홍경주 등의 반정공신들에 의해 조광조 등 신진세력인 사림파가 화를 입은 사건입니다.
중종반정으로 임금이 된 중종은 반정공신 세력의 독주를 견제할 새로운 세력으로 사림파를 중용하였습니다. 사림파들은 조광조 등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여 왕도정치 이념에 입각한 개혁을 추진하였고 점차 반정공신들과 갈등을 겪게 되었습니다.
기묘사화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공이 없이 공신에 책봉된 사람들을 삭제하는 문제였습니다.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76명이 공신에서 삭제되고 토지와 노비를 몰수당했습니다. 중종은 이렇게까지 되는 건 원하지 않았으나 사림파의 주장에 밀려 삭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자 위기감을 느껴 사림파를 견제할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습니다.
반정공신들 역시 대응책을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나라의 인심이 모두 조광조에게 돌아갔다’며 그대로 둘 경우 왕권이 위태롭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또 ‘주초위왕(조씨 성을 가진 사람이 왕이 된다)’라는 글자를 나뭇잎에 새겨 왕이 보게 함으로써 위기감을 갖게 하였습니다.
마침내 1519년 11월, 홍경주 등이 조광조가 임금을 속이고 국정을 어지럽혔으니 중죄로 다스려야 한다고 건의하자 중종은 이를 수용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사림파가 큰 화를 입었는데, 조광조는 능주로 귀양 가서 사약을 받았습니다.
계유정란 1453년, 세종대왕의 둘째아들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 임금을 몰아내고 임금이 되기 위해 김종서, 황보인 등 조정의 핵심인물을 제거한 사건입니다.
김종서 등은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수양대군의 동생 안평대군과 손을 잡았습니다. 수양대군은 권람, 한명회 등의 도움을 받아 김종서를 제거하고, 한명회가 작성한 살생부에 따라 황보인, 이양 등을 제거하였으며 정인지, 신숙주, 양성지 등은 세조의 대표적인 충신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세조를 도와 왕권을 강화하고 조선 전기의 문화 발달을 이끌었습니다.
사육신과 생육신 1456년(세조 1년), 단종을 다시 임금으로 세우려는 모의를 하다가 발각되어 죽음을 당한 여섯 신하, 즉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를 이르는 말입니다. 이들 중 무신이었던 유응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집현전 학사들로서, 죽은 문종 임금으로부터 어린 세자(단종)를 잘 보필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조는 이 사건을 보고받고 이들을 직접 심문하였는데, 고문과 회유로 그들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썼지만 실패했습니다. 세조가 이들의 마음을 돌리려고 한 것은 이들이 학문적으로 매우 훌륭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유성원은 일이 발각되자 자기 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박팽년은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감옥에서 죽었으며, 나머지 네 사람은 처형당했습니다. 사육신에는 들지 않지만 김문기 또한 이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당했습니다.
사육신은 반역죄를 지은 것으로 기록되어 오다가 중종반정 이후 역적이 아닌 충신으로 인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숙종 때는 뒤늦게 이들의 관직이 복구되었고, 묘를 세워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습니다. 한편 사육신 외에, 세조 즉위 후 벼슬을 그만두고 끝까지 절개를 지킨 여섯 신하, 즉 이맹전, 조려, 남효온, 김시습, 성담수, 원호를 생육신이라고 부릅니다.
제1차 왕자의 난 배다른 동생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자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의 불만이 상당히 컸습니다.
특히 조선 왕조 개국에 가장 공이 컸던 이방원은 정권을 좌지우지하고 있던 정도전, 남은 등과 갈등을 빚고 있었습니다. 정도전은 사병 해체, 군사권의 집중을 통해 왕실의 힘을 약화시키고 신하 중심의 집권 체제를 강화하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1398년 이방원은 정도전, 남은 일파를 제거하고 세자 방석과 그의 형 방번도 살해하였습니다. 이를 ‘제1차 왕자의 난’이라고 합니다.
제2차 왕자의 난 1차 왕자의 난 결과 둘째아들 방과가 왕위에 올라 정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종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그러자 방간과 방원이 세자 자리를 놓고 1400년 1월, 무력 충돌을 벌였습니다. 이를 ‘제2차 왕자의 난’이라고 합니다.
방원을 도운 공이 있으나 일등공신에 오르지 못해 불만이었던 박포는 방간이 방원에게 불만이 있음을 알고 방간의 거병을 부추겼습니다. 둘은 치열하게 싸웠으나 결국 방원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방원은 마침내 세자로 책봉되고 그 해 11월에 왕위를 물려받아 태종이 되었습니다.
작가 소개
저자 : 덕일 권영택
2015 현) 대한불교진각종 종의회 의장, 보원심인당 주교 정사, 대구 달서경찰서 경승실장.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인도철학과를 졸업하고, 동아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위덕대학교 불교문화학부 교수 및 불교대학원장, 진선여자중학교 교장을 지냈다.저서로는 <대일경 강의> <인도불교사상사>1-2 <밀교란 무엇인가> <대각 원각 진각> <육바라밀> <마음 밝히는 이야기> <말하기보다 걸어가기> <넌 참 예쁘구나> <경기도 문화유산 속 이야기> <구석구석 찾아낸 서울의 숨은 이야기>1-3 외 다수가 있다.
목차
제3차 모험 출발~!
제1장 인물이 마르지 않아서 - 마른 냇골
제2장 갈매기와 친할 수도 있었을 텐데 - 압구정
제3장 숯을 씻는 저승사자 - 탄천
제4장 아이고, 내 오금이야! - 오금동
제5장 반말하지 마시오! - 명륜동
제6장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 농업박물관
제7장 천명을 타고 났구나! - 살곶이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