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 17년 만에 재출간되는 조갑상 소설집 『테하차피의 달』만해문학상, 요산문학상 등을 수상한 조갑상 소설가의 세 번째 소설집 『테하차피의 달』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17년 만에 새로이 독자들을 만나는 『테하차피의 달』에서는 2000년대 전후 조갑상 소설가의 문제의식이 어디에 있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소설가는 “마음 깊이 가두었거나 지나쳤던 이야기를 하고 싶은 때가 있을 테니 수록작품을 쓴 2000년대 전후가 내게 그런 시간이었나 싶다.”고 ‘개정판에 부쳐’에서 밝혔다.
『테하차피의 달』은 총 7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표제작 「테하차피의 달」은 미국 모하비 사막의 ‘테하차피’에 위치한 태고사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다. 소설은 태고사에 묵언수행을 하러 모인 네 남자의 사연을 들려주며, 더 나은 삶을 꿈꾸며 고국을 등졌지만 정착하지 못하고 벼랑 끝에 내몰린 이민자들의 문제와 다양한 삶의 국면을 다룬다.
「섣달그믐날」은 외환위기 때 삼랑진역과 자갈치역을 배경으로 최하위층으로 내몰린 가장과 가족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빈집에라도 들어가 시골에서 시작하자는 사내 사정에도 불구하고 아들과 노모는 도시를 고집하며 대화는 이어지지 않는다.
▶ 망각과 회상의 굴레 속에서 겨우 움켜쥐는‘나’「통문당」과 「오어사(五魚寺) 가는 길」은 ‘회상’의 문법이 돋보이는 소설이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각각 대학 때 사귀었던 여인의 부고를 듣는다. 하지만 두 작품의 주인공 모두, 빈소를 찾는 대신 병원 주차장 한 구석에서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거나, 병원이 있는 도시를 빙빙 도는 것으로 조문을 대신한다.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에 대해 「통문당」의 주인공은 “차라리 들은 이야기나 지어낸 이야기라고, 누군가 딱 한 사람에게만 말하는 게 그때 그 시간을 위한 일이 되지는 않을지.”(73쪽)라며 의미를 부여하지만, 끝내 자신을 누르는 하중을 벗어날 수 없음을 느낀다. 「오어사(五魚寺) 가는 길」의 주인공 역시 낯선 사내에게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은 것을 뒤늦게 후회한다. 두 작품에서 작가는 과거와 현재의 자아를 통합하는 데 있어 ‘회상’이 중요한 양식임을 말한다.
▶ 먹빛에서 잿빛을 아우르는 부부의 눈빛을 담다「아내를 두고」, 「‘그린파파야 향기’를 보는 부부」는 예기치 않은 삶의 균열을 겪는 노년 부부와 젊은 부부의 심리를 담담하고 차분한 필치로 그려낸 작품이다. 「아내를 두고」는 노후에 접어든 부부가 종교문제로 갈등을 빚는 이야기를 담았다. 지금까지 살아오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고 살아가리라던 주인공의 생각은 아내의 입교(入敎)와 사고사를 맞아 여지없이 깨어진다. 「‘그린파파야 향기’를 보는 부부」는 살아가는데 그리 중요하지는 않으나 진지하게 이야기되는 부부의 대화를 먹먹하게 풀어냈다.
“왠지 기분이 안 좋아.”
문득 아내가 말한다. 걸음을 멈출 정도의 문득은 아니다.
“왜 통금 때문에?”
“그것도 조금은.”
“싸울 일은 아니야.”
“싸울 일도 그냥 지나가는데 영화 보고 왜 싸워요.”
부부의 걸음이 정상을 되찾고 지하철 입구에 다다른다.
-「‘그린파파야 향기’를 보는 부부」(143쪽) 중에서
▶ 골목마다 새겨진 이름 없는 목소리, 소설로 되살아난 부산『소설로 읽는 부산』(1998), 『한국소설에 나타난 부산의 의미』(2000), 『이야기를 걷다』(2006) 등 부산에 관한 책들을 꾸준히 펴내온 조갑상 소설가는 문학작품 속에서도 꾸준히 부산의 색(色)을 내며 ‘부산의 문화지리지’를 부지런히 그려나가고 있다.
일인칭 독백체로 헤어진 남녀의 사랑을 술회하는 「누군들 잊히지 못하는 곳이 없으랴」에서는 남선창고가 주 배경이다. 실제 있었던 ‘조선인 오모니 살인 사건’을 토대로 하며 1930년대 중반 부산의 모습을 복원한다.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희망을 꿈꾸며 살아간 조선인 오모니에게는 순간의 사랑, 멈추고 싶은 시간이 있다. 입은 있지만 열 수도, 말할 수도 없었던 이들의 목소리가 소설을 마무리한다.
표제작 「테하차피의 달」의 배경 미국 모하비 사막에 온갖 모양의 인물들이 모여들듯 소설집을 읽으면 부산 또한 온갖 모양의 인물들이 켜켜이 침전되어 있는 도시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야기’로 지역의 문화지도를 그려나가고 있는 조갑상은 지역문학에 여전히 발화되지 않은 목소리를 묻는 작가다.

아들은 언제나 몸과 마음을 다친 그런 모습으로만 나타났다. 그토록 소망했던 명문대학 세 곳의 입학 허가서를 흔들며 뛰어드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남시우는 머리를 흔들었다.
_「테하차피의 달」
먹감나무처럼 자기 가슴에도 진작부터 빗물이 스며들고 있다는 걸 인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B가 죽었다는 것을 어떻게든 알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는 비를 맞아야 했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쇼윈도 너머로 비 오는 거리를 보고 있는 그의 내면은 이제 무엇으로 가득 차올라 넘칠 지경이었다. 비가 그치지 않고 언제까지나 저렇게 끝없이 내릴 것 같은 절망스런 착각에 빠져들면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쓸고 내려가는 급류나 강물 같은 게 눈앞을 희뜩희뜩 지나쳐갔다.
_「통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