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애도의 말은 대개 앞으로 나아가라고 재촉한다. 슬픔을 정리하고, 마무리 짓고, 일상으로 돌아오라고. 김지숙 시인의 시집 『우리는 기꺼이 아무것도 아니어서』는 그 재촉을 거절하는 자리에서 시작된다. 시인은 첫머리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기억해야 할 너의 이름을//나지막이 부르는 일/그것뿐이다”라고 쓴다. 이름을 불러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 않고 부르는 일. 이 시집은 그 무력하고도 집요한 호명의 행위를 끝까지 밀고 나아간다.
출판사 리뷰
걷는사람 시인선 161
김지숙 시집 『우리는 기꺼이 아무것도 아니어서』 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억해야 할 너의 이름을 나지막이 부르는 일
그것뿐이다”
돌멩이 곁에, 죽은 자 곁에
나란히 앉아 부르는 이름
애도의 말은 대개 앞으로 나아가라고 재촉한다. 슬픔을 정리하고, 마무리 짓고, 일상으로 돌아오라고. 김지숙 시인의 시집 『우리는 기꺼이 아무것도 아니어서』는 그 재촉을 거절하는 자리에서 시작된다. 시인은 첫머리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기억해야 할 너의 이름을//나지막이 부르는 일/그것뿐이다”라고 쓴다. 이름을 불러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 않고 부르는 일. 이 시집은 그 무력하고도 집요한 호명의 행위를 끝까지 밀고 나아간다.
시인이 부르는 이름은 결코 한 사람에게만 머물지 않는다. 「연인」의 민수는 부를 때마다 다른 얼굴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며 “난 너의 무덤이 될 거야, 넌 나의 묘비명이 될 거야”라는 고백으로 화자와 뒤섞인다. 「인형의 집」과 「앨리스의 세계」를 넘나드는 앨리스는 “왜 나를 구해 주지 않는 거지?”라는 결핍의 물음을 스스로 “영혼”이라 부르며 자라난 아이다. 표제 구절이 담긴 「슈퍼 블루문」에서 시인은 “우리는 그 모두에게 잊혀도 좋지, 우리는 기꺼이 아무것도 아니어서”라고 노래한다. 세상 전체에게 잊혀도 상관없다는 이 체념은 역설적으로 오직 한 사람에게만은 끝까지 잊히지 않길 바라는 마음의 가장 깊은 이면이다. 시인은 이름을 남기고 사라진 이들과 이름조차 갖지 못하고 스러진 이들을 구분하지 않는다. 우리가 미처 다 슬퍼하지 못한 수많은 죽음이 시집 안에서 비로소 나란히 제자리를 얻는다.
『우리는 기꺼이 아무것도 아니어서』는 섣부른 위로를 건네며 슬픔을 매듭짓는 대신 슬픔 곁에 온전히 머물기를 택하는, 위로를 유예하는 시집이다. 문이 열릴 때마다 자신과 겹치고 부서지는 얼굴을 좇는 「카페,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처럼 시인은 상실을 서둘러 정리해 치워 버리는 대신 그 아픔 곁에 조금 더 머물러도 괜찮다고 말한다. 시집의 마지막에는 “우리 없는 자리마다/흔들리고 있는/풀들”이라는 문장이 등장한다. 사람은 떠나도 그가 지나간 자리는 여전히 흔들림으로 남는다는 것, 김지숙 시인은 그 남겨진 흔들림을 아주 오래 들여다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언어로 우리를 부재의 곁으로 초대한다.
민수가 건너편에서 부른다
몇 걸음이라도 더디 걸으면 공터의 어둠 속으로 스미듯 민수는 사라지기도 한다
민수가 무어라 중얼거리자 자모 몇 개가 큰 나무로 날아가 앉는다 날개 부딪는 소리도 없이 나무들 잠시 가지를 휜다
창문도 벽도 지붕도 없는 너의 집은 참 쓸쓸하구나
그래도 민수가 있어서 아늑하다 민수의 손은 부드럽다
민수는 민수가 아닌 나를 민수라 부르고
민수도 민수가 아니어도 민수가 되고
(중략)
난 너의 무덤이 될 거야
넌 나의 묘비명이 될 거야
민수와 민수의 민수인 나는 서로를 마주 본다
보호자이거나 증인처럼 구름은 입안 가득 침묵을 머금고 그늘처럼 번져 간다
―「연인」 부분
우리는 그 모두에게 잊혀도 좋지, 우리는 기꺼이 아무것도 아니어서 우리는 그 모두에게 어긋나서 너와 나는 입을 맞추고 그 모두에게 다정할 수 있던, 나의 사진엔 풍경뿐이고 너의 사진엔 우리가 없지, 세례처럼 구름 쏟아진다, 죽은 내가 나를 업고 간다, 언젠가 그리 길지 않은 이야기가 될, 마치 다른 누군가에게 일어난 일처럼, 한 번의, 이미 충분한, 거짓말, 나는 나의, 너는 너의, 어디에도 도착하지 못할, 흘러가는, 말라 버린 오렌지색 백합들이 강물 위로 떠내려간다,
―「슈퍼 블루문」 부분
공원의 아이가 나뭇가지로
죽은 나방 날개를 콕콕 찍어 보더니
일그러진 몸뚱이만 남은 나방을 두고
무심히 가 버린다
나는 늦여름 텅 빈 공원 너머를 본다
아름다운 것들이 먼 곳에만 있던 나날들
많은 것이 말없이 지나간 뒤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것도 거의 없다
(중략)
멀리 풍경을 보고 있으면
많은 것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어느 것 하나쯤은
말할 수 없이 이해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공원의 가장자리 그늘에서 초록 고사리들이 자라고 있다
성실하게 포자를 만들며
초록 고사리들은 겨울이 다 되도록 자랄 것이다
―「보스턴 고사리」 부분
작가 소개
지은이 : 김지숙
2022년 《시와 사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목차
1부 난 너의 무덤이 될 거야, 넌 나의 묘비명이 될 거야
공동체
밤의 경주
슈퍼 블러드문
블랙 샌드 비치
한밤중에 눈이 내리네 소리도 없이
한 그루 라락일이
연인
평온
연화 교차로
죽은 나무
붉은 석양의 언덕
우리는 멀어지고 멀어지며 사랑한다
산책
흰 복도에 앉아
2부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슬픔의 일을 했다
건널목 옆 정류소
희망
우기
제주 버스
제주도 푸른 밤
진눈깨비
신도시
반구대 암각화
손톱달
우연히 본 새에 관하여
너무 많은 저녁
조용한 배웅
일기 예보
블랙 펭귄
3부 내 집엔 사랑이 넘치죠 깊고 검고 무서운
인형의 집
관찰의 기술
앨리스의 세계
습기의 내력
아무도 모르는 사람
메아리의 형태
만남의 광장
검은 강이 흐르는 동네
소설
찰흙 놀이
경주
시부야의 저녁
quill
슈퍼 블루문
4부 우리 없는 자리마다 흔들리는 풀들
귀울림
실감
자유
타워에서
골동품
그림자의 형태
저녁의 홀리 모터스
새출발
카페,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Dies Sextus
목성
폭설 주의보
보스턴 고사리
두 사람
미래의 형식
나는, 나를, 아무
해설
되돌아오는 이름의 시간
—최진석(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