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2024년 7월 10일 새벽, 대전 서구 용촌동 정뱅이마을을 덮친 수해와 이를 극복하는 과정을 담았다. 그러나, 단순한 수해 기록이 아니다. 사라지는 기억을 붙잡아 두기 위한 저항이다. 재난을 겪으며 경험했던 실수와 실패를 기억해서, 이런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해 볼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폴 리쾨르(Paul Ricoeur)는 기억이 ‘현재에서 재구성되는 과거’라고 보았으며, 망각은 불가피하지만, 기록을 통해 대항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모리스 할박스(Maurice Halbwachs)의 집단기억 이론에 따르면, 개인의 기억은 사회적 틀 속에서 형성되고 유지된다고 한다. 혼자의 기억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여러 주민이 모일 때마다 했던 이야기가 하나둘 엮이고 쌓이면서 때로는 글로 정리되고, 때로는 그림이나 사진으로 표현될 때, 공유된 기억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이번 수해를 통해 알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물난리에 관한 정뱅이 마을 주민들 이야기가 점점 더 닮아가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집단기억을 오정훈 감독이 다큐멘터리 영화 <정뱅이>로 만드는 과정에 함께하면서, 좀 더 깊이 생각하며 쓴 글을 모아 이 책을 내게 되었다.
이 책은 7부 24장으로 구성했다. 제1부에서는 재난 발생 후 첫 72시간의 생존 투쟁을 기록한다. 제2부에서는 복구 과정에서 나타난 갈등과 소통의 어려움을 다룬다. 제3부와 제4부에서는 누가 어떻게 도왔는지, 진흙을 퍼내고 일상을 되찾아가는 과정을 서술한다. 제5부에서는 예술과 의례를 통한 치유를 탐구하고, 제6부에서는 아직 끝나지 않은 회복의 여정을 따라간다. 제7부에서는 재난과 함께 사는 마을의 미래를 전망한다.
주요 구간 하천 정비 및 제방 복구공사는 완료했지만, 주민들 마음속 트라우마는 여전히 남았다. 비만 오면 무서워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어르신들, 빗소리에 그날의 급류 소리가 겹쳐 들리는 사람들. 이 책을 통해 그들의 목소리를 담아 기록으로 남기고, 동시에 미래를 향한 희망의 씨앗을 심고자 한다.
출판사 리뷰
물이 지나간 자리에서 공동체를 다시 묻다
재난은 지나간 뒤에야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낸다. 물이 밀려오는 순간에는 살기 위해 뛰어야 하고, 물이 빠진 뒤에는 진흙을 퍼내야 하며, 어느 정도 집이 정리되고 나서야 사람들은 묻기 시작한다. 그날 우리는 무엇을 겪었는가. 누가 우리를 살렸는가. 무엇이 부족했는가. 그리고 다시 이런 일이 온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재난과 함께 사는 마을 정뱅이』는 2024년 7월 10일 새벽, 대전 서구 용촌동 정뱅이마을을 덮친 수해의 기록이다. 이 책은 단순한 수해 보고서도, 행정 대응 평가서도, 주민 인터뷰 모음도 아니다. 저자는 자신을 ‘재난 당사자이자 마을 주민이라는 내부자이면서, 사회과학자라는 외부자’의 위치에 놓고 이 경험을 성찰한다. 그래서 이 책은 한 마을이 겪은 물난리의 기록인 동시에, 기후위기 시대에 공동체가 무엇으로 버틸 수 있는지를 묻는 자기민족지학적 기록이다.
책의 출발점은 ‘시간이 가기 전에 기억을 붙잡아야 한다’라는 절박함이었다. 재난의 흔적은 생각보다 빨리 사라진다. 진흙이 마르고, 쓰레기가 치워지고, 벽지와 장판이 새것으로 바뀌면 재난은 끝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저자는 재난이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빗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 다른 지역의 재난 소식을 들을 때마다 그날 새벽을 다시 떠올리는 사람들, 집은 고쳤지만 마음속 균열을 여전히 안고 사는 사람들. 이 책은 바로 그 사라지는 기억에 맞서는 기록이다.
가장 강렬한 대목은 첫 72시간의 기록이다. 새벽 4시 무렵, 제방이 무너지고 물이 마을로 밀려오는 장면은 재난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극적이다. 그러나 책은 그것을 과장된 서사로 소비하지 않는다. 오히려 차분하게 그 순간 사람을 살린 것은 무엇이었는지를 묻는다.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옆집 사람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는 것, 누가 어디 사는지 아는 것, 마을 지리를 몸으로 기억하는 것, 누군가의 집에 보트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 저자는 이것을 '자조'와 '근조'의 힘으로 설명한다. 119 구조대가 도착하기 전, 혹은 도착하고도 장비 부족으로 움직이지 못하던 시간에 사람을 살린 것은 평소에 축적된 이웃 관계였다.
이 책의 미덕은 재난 속 공동체를 낭만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기술한 데 있다. 대피소의 첫날에는 분명 레베카 솔닛이 말한 '재난 유토피아'가 나타난다. 같은 옷을 입고, 같은 밥을 먹고,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 사이에서 평소의 경계가 일시적으로 무너진다. 낯선 이들의 도움, 자원봉사자의 손길, 함께 밥을 먹고 이야기하는 시간이 사람들을 버티게 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 재난 유토피아는 사흘을 넘기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구호물자 배분, 복구 우선순위, 주택과 하우스의 피해 차이, 행정과 주민 사이의 소통 부재가 갈등을 불러온다. 이 정직함이 책을 신뢰하게 만든다. 좋은 공동체란 갈등이 없는 공동체가 아니라, 갈등을 드러내고 다시 조정하는 능력을 갖춘 공동체라는 사실을 이 책은 보여준다.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기록은 성찰로 깊어진다. 저자는 재난 대응의 중심을 ‘예방’에서 ‘회복 탄력성’과 ‘지속 가능성’으로 옮겨야 한다고 말한다. 제방을 더 높이 쌓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기후 위기 시대에 재난을 완전히 막겠다는 발상은 점점 더 허약해진다. 중요한 것은 제방이 무너져도 피해를 줄이고, 무너진 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관계와 구조를 갖추는 일이다. 이때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공동체 의례다. 함께 밥을 먹고, 이야기 마당을 열고, 예술제를 열고, 풍물굿을 하는 행위는 부차적 행사가 아니다. 말로 정리되지 않는 상실과 공포를 공동체가 함께 다루는 방식이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저자가 전통을 단순한 향수로 호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두레, 향약, 계, 풍물굿은 과거의 아름다운 풍속으로만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오늘의 재난 회복력과 연결되는 사회적 기술로 재해석된다. ‘이웃의 이름을 아는 것, 함께 밥을 먹는 것, 아플 때 찾아가는 것’이 재난 회복력의 뿌리라는 문장은 이 책의 핵심을 압축한다. 재난 대응은 비상시에만 작동하는 매뉴얼이 아니라, 평상시에 축적되는 관계의 밀도라고 설명한다.
『재난과 함께 사는 마을 정뱅이』가 끝내 도달하는 곳은 희망이지만, 그 희망은 밝고 손쉬운 낙관이 아니다. 저자는 먹고사는 문제를 외면한 공동체는 오래갈 수 없다고 말한다. 의례와 돌봄이 살아 있는 마을도 경제적 토대 없이는 지속될 수 없다. 재난 이후의 마을은 좋은 마음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공정한 규칙, 경제적 기반, 행정과 주민의 소통, 반복되는 돌봄의 실천이 함께 필요하다고 강변한다.
이 책은 정뱅이마을이라는 특정한 장소의 기록이지만, 그 질문은 훨씬 넓다. 기후 위기 시대에 우리는 어디에서 안전을 찾을 것인가. 국가는 어디까지 할 수 있고, 이웃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재난이 지나간 뒤에도 남는 것은 무엇인가. 재난은 공동체를 파괴하지만, 동시에 공동체가 무엇이었는지를 드러내고, 때로는 우리가 잊고 있던 마을을 다시 만들어 준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날이 10일이죠. 그날 새벽 1시 40분~50분부터 비가 많이 왔어요. 농작물 재배하는 하우스 시설 안에 물이 들어오지 않게 양수기를 여러 대 동원해 새벽 4시 정도까지 펌핑을 했어요. 그때 얼추 비가 그쳤고 물을 다 빼놔서 농작물 피해가 없었죠. 그런데 이제 마지막으로 한 바퀴 돌고 동네 앞에 딱 오는데 우측에서 황토물이 막 폭포처럼 쏟아져 내려오더라고요. ‘이거 정말 큰일 났다’ 싶어서 승용차를 산 위에 올려놓고, 뛰어가지고 농막에 있는 우리 식구들한테 큰일 났으니 나오라고 했어요.”
재난 사회학자 찰스 프리츠(Charles E. Fritz)는 1961년 연구에서 재난 초기에는 정부가 아닌 자조(自助)와 근조(近助)가 생존을 결정한다고 밝혔다. 정뱅이마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웃이 침수된 집안에 갇혔던 어르신들을 구했다.
“구조대가 사이렌을 켜고 거기서 구경하고 있는 거야. 이런 경우 보트를 타고 들어와야 하는데, 보트를 보유한 게 없대. 보트를 가지러 간 40분 동안 그냥 쳐다보고 있는 거야. 어쨌든 어르신들을 하나둘씩 구하기 시작했어. 우리 동네 가장 젊으신 한 분이랑 교수님이 같이 어르신을 업어서 데려오면서 중간에 같이 끌고 여기까지 오고, 혼자 들어갔다가 중간에 또 같이 끌고 데려오고, 이렇게 어르신 5명을 구한 거야.”
레베카 솔닛(Rebecca Solnit)이 ‘재난 유토피아(Disaster Utopia)’라는 말로 포착하려 했던 현상이 정뱅이마을 대피소에서도 나타났다. 재난이 기존의 사회질서를 무너뜨리고, 그 빈자리에 일시적이지만 놀라울 정도로 평등하고 협력적인 관계가 들어선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후에도, 2011년 동일본 대지진 후 도쿄에서도 관찰된 이 현상은 재난의 보편적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정뱅이마을에서는 이것이 아주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났다. 태평동에서 한의원을 하는 분이 자기 고향이 수해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일주일에 몇 번씩 정뱅이마을에 와서 어르신들을 치료해 주었다. 마을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 2주간 매일 와서 손 마사지, 발 마사지를 해주었다.
작가 소개
지은이 : 권선필
대둔산 갑천과 계룡산 두계천이 만나는 대전 정뱅이마을에서 1999년부터 살아온 권선필은, 2024년 7월 10일 제방 붕괴로 마을 전체가 침수된 재난의 한복판에 있었다. 목원대학교 교수로서 행정혁신과 주민자치 그리고 사회혁신과 실패박람회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환의 가능성을 다양한 방식으로 탐구해온 그에게, 수해는 그 모든 경험이 수렴하는 뜻밖의 돌파구가 되었다. 이론이 아니라 삶이 먼저였던 재난의 현장에서, 그는 재난 당사자이자 연구자, 그리고 활동가라는 세 겹의 눈으로 공동체 회복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다.
목차
Prologue
제1부 물이 밀려왔을 때- 첫 72시간의 기록
1. 새벽 4시, 물은 이렇게 왔다.
2. 대피소는 현대판 노아의 방주인가?
3. 그러나 유토피아는 사흘을 넘기지 못했다.
제2부 갈등과 소통
4. 구호물자를 둘러싼 갈등: 나눔이 상처가 될 때
5. 복구 우선순위를 둘러싼 논쟁: 주택인가, 하우스인가
6. 소통하려 애썼지만, 부족했던 것들: 말은 많았고 듣는 사람은 적었다
7. 당장의 문제, 그리고 멀리 보지 못한 아쉬움: 급한 불을 끄다가 놓친 것들
제3부 누가 도왔고, 어떻게 도왔는가
8. 가까이 있는 이웃이 최고다: 호조와 근조의 힘
9. 동문회, 종교단체, 계원들이 달려왔다: 약한 연대의 강한 힘
10. 자원봉사자들: 페이스북으로 연결된 낯선 이들
11. 정부와 지자체: 필요하지만 늦고 부족했던
제4부 진흙과 쓰레기, 그리고 회복의 시간
12. 복구의 첫 단계: 진흙을 퍼내다
13. 도배, 장판, 주방: 작은 것들의 의미
14. 기억이 사라지고 있다: 기록의 필요성과 집단 기억
제5부 재난에서 치유와 회복
15. 이야기 마당과 공동체 식사: 말하기와 먹기, 가장 오래된 치유의 형식
16. 예술인들의 감수성: 다른 방식으로 보고,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다
17. 왜 정뱅이마을은 예술제를 열었는가: 의례의 사회학
18. 전통 의례의 힘, 풍물굿: 조상들이 알고 있던 치유의 방법
제6부 회복의 긴 과정
19. 개인과 가정의 다양한 회복 궤적: 같은 재난, 다른 회복
20. 특별재난지역과 외부 지원의 명암: 지원은 권리인가, 자선인가
제7부 재난과 함께 사는 마을을 꿈꾸며
21. 재난 유토피아를 넘어: 재난을 일상으로, 자연과 함께 사는 지혜
22. 실패와 후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감재(減災)의 철학, 되어감의 지혜
23. 생노병사의 의례가 중심이 되는 마을: 일상의 돌봄이 재난의 회복력이다
24. 지속 가능한 마을: 먹고사는 문제, 경제적 토대 없이는 공동체도 없다
Epilog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