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매화 지는 밤
고월孤月로 떴습니다
당신이 다니시는 고샅길
비오면 허리까지 차는 골가실 냇물
밤 이슥토록 푸른 대숲 비추는
매화꽃 흩날리는 밤
타다 만 비파 줄로 남았습니다
달 밝은 밤 맑은 술 한 잔에
행여 그대 긴 손가락 울릴까
험한 재 구비구비 힘들 때
혹여 둥근 음에 쉬어가라시며
청아한 그대 피리 소리
휘영청 고월에 걸리는 밤
천년 벼루 속 푸른 달빛 찍어 그리는
흰 화선지 속 함제미인含睇美人이고 싶습니다
― 「함제미인」 전문
파도의 붉은 울음 씻어주느라
적갈색 몸이 된 적벽강 절벽은
내가 찾아 헤매던 당신 얼굴인가요
끝없이 펼쳐진 당신 책 앞에서
숨도 쉬지 못하고 바라만 볼 뿐
몇 날 며칠 밤새워 찾은 날것의 시어들이
햇빛물고기 되어 절벽을 튀어오르네요
한 방울 투명한 물방울이었다
장대 소나기와 천둥번개이었다
마침내 무지개로 뜨는 당신
당신의 무한한 변용과 눈부신 비상 앞에
차마 바라보지 못하고 눈을 감습니다
저 건너 소래사蘇來寺에 들려오는 저녁 북소리
몸이 없는 영혼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석양에 검붉게 물든 두꺼운 서책을 접고
당신과 함께 한 지상의 모든 길을 지웁니다
다시 돌아온다는 소래사
해와 달이 함께 머무는 연꽃살문,
나뭇결 환한 연꽃 속에서 당신을 다시 만납니다
― 「적벽강 건너 소래사蘇來寺」 전문
함석지붕 위 잔설 녹으며 처마 밑 낙숫물 똑똑 떨어지는 소리
앞마당 빨랫줄에 참새 쪼르르 내려앉는 소리
우물가 배나무 검은 가지 위 까치, 무채색 겨울을 지우며
연둣빛 봄을 물고 포르르 날아오르는 소리
사각사각 텃밭에서 부추 자르는 외할머니 손등에 또르르 이슬방울 구르는 소리
아침이슬 속 단발머리 계집애 포실한 두 볼이
동산 위 떠오르는 아침 해처럼 볼그스레해지고
목단 꽃무늬 감색공단 치마저고리의 어머니
살포시 섬돌을 밟고 대문을 나서는 순간
방금 실눈 뜬 분꽃, 코티분 향긋한 내음이 탱자나무 고샅길까지 번지는
어머니 손잡고 하얀 신작로 따라 나풀나풀 학교 가는 길
같이 가자며 하동지동 달려오는 옆집 머스마의 숨찬 목소리
미루나무 가지 사이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아롱아롱 귀를 간질이고
― 「입춘」 전문
작가 소개
지은이 : 정영숙
경북 대구 출생. 아호: 나라那羅. 서울교육대학교 졸업.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1993년 시집 『숲은 그대를 부르리』로 등단.시집 『지상의 한 잎 사랑』, 『물 속의 사원』, 『옹딘느의 집』, 『하늘새』, 『황금 서랍 읽는 법』, 『볼레로, 장미빛 문장』, 『나의 키스를 누가 훔쳐갔을까』. 활판시선집 『아무르, 완전한 사랑』. 명화 산문집 『여자가 행복해지는 그림 읽기』.한국시인협회 회원, 한국여성문학인회회원, 한국가톨릭문인회 회원, 시터 동인.한국문화예술위원회기금 수혜. 목포문학상 본상, 시인들이 뽑는 시인상, 『경북일보』 문학대전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