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권늘 시집이 그리고 있는 세계와 자아의 흔들림, 혹은 생명과 타자의 발견으로 말미암은 실존의 새로운 양태에 관한 자각은 허약한 내면과 불안 심리에 곧잘 자신을 내맡기곤 하는 현대인에게 던지는 의미가 가볍지만은 않아 보인다. 시집에 실린 생태와 환경에 관한 시편들에 나타난 메시지도 이런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시인의 마음이 기울어지는 지점은 아무래도 실존이 떠맡을 수밖에 없는 근원적인 고독과 여기에서 발현하는 소통 부재 및 불안한 미래의 전망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요소들을 전체적으로 포괄하는 범주로써 시간이 남기는 퇴색의 이미지와 형상이다.
시인의 눈에 보이는 이러한 총체적인 경색(梗塞)의 풍경 속에서 점점 스러지거나 멀어지는 ‘유토피아’로서 이상향은 시인의 마음 깊숙이 새근새근 잠들어 있음을 확인한다. 이번 시집은 그러한 아포리아의 발걸음에 묻은 언어의 입술, 부르지 못하는 노래임을 알면서도 끝내 부를 수밖에 없는 허방 속의 간절한 속삭임으로 가득 차 있다.골목의 방백은폐를 불러들였다그늘은 지나치는 것으로 충분했고후미진 곳의 일은 늘 경계에 서 있었다노출의 위험 속에서 하나둘 불러 모으는 은밀함이 있었다비밀은 공정하게 숨을 쉬었고골목은 슬그머니 서로를 부르고 있었다가려진 생각이 머물고비로소 골목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골목이 사라진 도심 한가운데, 가리고 싶던 일들이 하나둘 드러났다객석을 스치듯 지나치는 이들과 눈을 맞추는 일골목의 어귀에서 흩어지던 연기는 환기통속으로 사라졌다고개를 숙인 채 담배의 불을 붙이는여인의 등선
시간이 노는 호숫가호숫가를 배회했다아침나절에 쳐 놓은 그물코를 따라 하루는 좀비처럼 빠져나가고시큼해진 저녁엔 생기가 돌았다라면이라 생각했던 버너에는 놀랍게도 밥이 끓고 있었다어제의 이야기가 상대를 바꾸어 가며 되풀이되고바닥 난 화제는 조금 전 떠나버린 낯선 이의 뒷모습을 설거지하고 있었다다시 나타난 이의 짐 속에도 만만치 않은 조구가 웅크리고 있었다그와 이야기가 다시 시작될 즈음 호수에는 붉은빛들이 반짝이기 시작했다삼월의 한기가 살 속을 파고들 때 차림새가 마술처럼 바뀌었다당연하던 침묵이 물수제비 되어 건너편 불빛을 때릴 때 밤의 살림망엔여럿의 핑계가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시간은 다시 모여 한가한 잡담을 나누고성긴 그물코를 다시 깁는 아침나절의 호숫가
길에서 길을 묻다길을 따라나섰다그의 길은 늘 젖어 있었고 바람이 불었다돌아가는 길이 많고 가다 보면 사라지기도 했다가끔 그에게 길에 관해 묻기도 했지만,그때마다 그는 웃었다 그 자신도 잘 모른다고 했다거침없이 걷다 이내 주춤거리는그의 길은 처음부터 닿을 곳이 마땅치 않았다길을 벗어나지 말라는 날 선 눈빛만 있었다가끔은 그도 가던 길을 잃고 돌아 나오곤 했다그럼에도 그를 따라나서는 사람들그 길 위에 놓인 수많은 질문 가운데나를 흔드는 빛이 자랐다그와의 보폭은 달랐지만 기꺼이 같이 걷었다그의 길에서 나를 보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길이 달라졌다.
작가 소개
지은이 : 권늘
서울 출생. 2015년 <문학광장>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기억에 대한 오해>가 있다. 2013년 인천예술인 의장상을 수상했으며, 2016년 인천문화재단 예술지원금을 수혜했다.
목차
● 시인의 말
제1부
골목의 방백 10
광장의 시계. 지금은 안녕하십니까? 12
화재의 화제 14
박제된 날들 16
낯선 언어들 18
요란한 장식 20
나날의 탈각 22
집 나간 개와 팬케이크 24
피카소의 화실 26
시간이 노는 호숫가 28
다시 부르는 노래 30
빙하의 언어 32
끝의 시작 34
늙은 말은 그네를 탄다 36
제2부
이 바람이 계절을 바꿀 수 있을까 38
네. 오후 5시경입니다 41
병명이 꼭 필요한가요 44
사과 만들기 46
새벽 전철 48
19번 버스를 타야 한다 50
처음의 관계학 52
허공의 북소리 54
김 씨 56
백중百中 58
삼월 60
불가능을 설계합니다 62
당신은 조금 더 멀리 있습니다 64
혀의 난 67
제3부
어떤 죽음 70
소멸의 방식 72
불의 시간 74
아직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76
낙첨 일기 78
엑소더스 80
처마 아래서 82
짓 84
그 산의 생태학 86
끝내 바람이 되어 88
그들의 무게 90
숙성 92
구석의 온도 94
제4부
고래, 1970 98
동묘시장 100
길에서 길을 묻다 102
소리의 눈 104
바람이 지나간 자리 106
색의 중력 108
바지선 110
늙은 가로수 앞에서 112
둘의 방정식 114
소심한 시비 116
머문 자리에 바람이 인다 118
명당 120
엄마는 별을 본다 122
산. 그 너머에 대하여 124
▨ 권늘의 시세계 | 정훈 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