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가로세로 이십육 밀리미터, 총길이 삼 미터 정도인 이 이야기책은 자연적이고 친화적인 재료를 사용해 하나하나 손으로 뜯고, 접고, 이어 붙여서 만듭니다. 크기는 작지만 변화무쌍한 여러 요소들을 갖고 있습니다. 길게 이어지는 면면을 착착 접어 놓은 병풍책이면서, 맨 끝 쪽 접힌 부분을 둥글게 펴서 원기둥을 만들고 둘둘 말면 두루마리가 되기도 합니다. 유난히 긴 가름끈으로 책장이 서로 엮이도록 갈피를 칭칭 감기도 하고, 착착 접은 책이나 둘둘 만 책을 칭칭 감아서 고정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이니 저마다의 방식으로 책에 다양한 변화를 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책을 읽는 것뿐만 아니라 직접 만들 수도 있고, 여러 재미난 활동도 가능하게 합니다. 아울러 남다르게 책을 수집하고 소장하는 데 부합하기도 합니다. 이래저래 자꾸 손이 가는 책이라 베이지 않도록 종이를 날카롭게 자르지 않고 점선으로 뜯어서 오톨도톨한 촉감도 남다릅니다. 누군가 그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그것은 누군가에게로 가 그것이 됩니다. 이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책 소개)이천사년에 태어난 딸아이가 걷고 말하기 시작하면서 이야기꾼이 되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이 궁금한 아이와 세상을 다시 알아 가는 아빠 사이에서 짓거나 꾸민 이야기도, 전래되는 이야기도, 책에 담긴 이야기도, 소문이나 그 어떠한 이야기도 수없이 꽃을 피웠습니다. 주저리주저리, 이야기들은 시간을 따라 흘러가거나 남아서 맴돌았습니다. 맴도는 이야기들은 이러쿵저러쿵 정황만 있습니다만, 매번 눈이 동그래집니다. 변화무쌍합니다. 권선징악을 강조하는 감동도 없습니다만, 그 이야기들은 씨앗과 같아서 언제라도 어디서라도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웁니다. 그 이야기들을 책으로 만들자고 오랜 시간 생각이 심심했습니다. 이 이야기책이 내일의 독자에게 재미있을까, 쓸모 있을까 따위까지 걱정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내일의 결과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라 온갖 상상이 난무하지만, 옛 것은 이미 결과가 소상하니 적절한 우리 옛 것을 찾고, 알고, 따라 하면 좋을 일이었습니다.
동글동글하고 울긋불긋한 무당벌레를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짓고, 문자도를 재미나게 엮어서 남다르게 이야기책 만들었습니다. 무당벌레 등에 있는 점을 헤아리며 수를 알고 익힐 수도 있습니다. 다양한 성격이나 성향을 알 수도 있습니다. 사회적 지위, 권력, 힘 따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상상할 수도 있습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이 이야기책을 누릴 수 있게, 이미 우수한 우리 옛 것을 따라 해서 여러모로 새롭게 하고자 했습니다.
한글의 아름다움이 온전하게 드러나도록 옛 세로쓰기를 따라 했습니다. 한글 서체는 '에스엠 견출명조'를, 영문 서체는 '가라몬드(garamond)'를 사용했습니다.
문자도는 글자로 그린 그림인 우리 옛 '문자도'를 따라 했습니다. 영문 서체 '디도(didot)'의 알파벳과 기호를 재구성해서 '무당벌레' 모양이 드러나게 했습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문자와 기호를 새롭게 경험하게 합니다.
크기와 모양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 《무구정광대다라니경
(無垢淨光大陀羅尼經)》을 따라 했습니다. 여러 쪽이 길게 이어지고 펼쳐지는 책입니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대한민국 국보 백이십육호로 신라 경덕왕 십년(751)에 경주 불국사를 중창하면서 석가탑을 세울 때 봉안한 것입니다. 천구백육십육년 시월에 석가탑을 해체하면서 발견했습니다. 비단보에 싸여져 있던 이 경전은 닥종이를 이어 붙인 두루마리로 폭 칠 센티미터 정도, 길이 육 미터 정도입니다.
무당벌레는 몸길이 칠 밀리미터 정도의 작은 반구형 곤충입니다. 노란색, 주황색, 검은색 등 매우 다양하며 변이가 심해서 등에 있는 점무늬 수도 다양합니다. 점무늬가 없는 무당벌레도 있습니다. 딱지날개가 있고 그 안에 실제로 비행에 사용하는 날개가 있습니다. 들이며 산이며 먹이로 삼는 진딧물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서식하며, 봄부터 늦가을까지 성충을 볼 수 있습니다. 성충은 무리지어 풀이나 낙엽 밑, 건물 안 등 특정한 장소에서 겨울을 납니다. 위태로워지면 냄새 고약한 액체를 내뿜어 모면합니다. 울긋불긋한 몸색에 점무늬가 있는 것이 무당의 화려한 복색과 닮아서 '무당벌레'라고 불렀으리라 추정합니다. 작고 귀여운 데다 고마운 곤충이어서 세계 수많은 이야기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천구백이십삼년 순문학 동인지 《백조(白潮)》 삼호에 발표된 홍사용(洪思容, 1900-1947) 시인의 시 제목이기도 합니다. 많은 시, 희곡, 소설을 발표한 그의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경향을 대표하는 시입니다. 이 책의 이야기와도 여러모로 어울리는 데가 있어서 제목을 그대로 따라 했습니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최훈 엮고, 연장통 펴내다.
나뭇잎 사이로 쉬엄쉬엄 따사로운 햇살이 내려앉는 곳에 자그마한 바위가 있어요. 청설모가 잠시 쉬어 가는 곳이고, 벌과 나비가 찾아와서 노래하는 곳이에요. 사나운 짐승들도, 분주한 사람들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치는 그런 곳이에요. 새 소리, 물 소리, 바람 소리 들이 잔잔해요. 풀 냄새, 나무 냄새, 흙 냄새 들이 향기롭게 흘러요. 평화로운 시간도 함께 흘러요. 너무나도 평화로워서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요.
1
무당벌레 한 마리가 거드름을 피우며 바위에 내려앉았어요.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왕이 왔다고 떠들어요. 모두 와서 보라고, 등에 점이 하나 있다고, 큰 소리로 떠들어요. 등에 점이 하나 있는 것은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왕이라는 증거라네요. 모두 들으라고 자꾸만 더 크게 떠들어요. 목소리는 타고났나 봐요. 따사로운 햇살 아래서 낮은 소리로 노래하던 무당벌레 한 마리가 그 소리를 듣고 황급히 몸을 숨겼어요.
이런 세상에, 점이 하나 있는 무당벌레가 있다니.
동그란 등이 반짝반짝 빛나요. 정말로, 점이 하나 있네요. 어찌나 거드름을 피우는지 배가 자꾸 불뚝해져요. 등에 점이 하나 있는 게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몰라요. 왕이니까요. 휘리릭. 바람이 지나가면서 황금빛 나뭇잎 하나를 떨어뜨렸어요. 폭신폭신한 것이 왕에게 딱, 어울리는 황금 방석이에요. 근사하네요. 왕은 그 위에 올라앉았어요. 따사로운 햇살이 내려앉아 반짝반짝 빛나요. 자리가 더욱 화려해져요. 이곳이야말로 왕이 머물 자리예요. 왕은 정말, 목소리가 커요. 거기 아무도 없느냐고, 여기 왕이 왔다고, 자꾸 떠들어요.